악양에서 비우다, 악양에서 채우다 [하동 슬로시티 여행]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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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웨이하동 스카이워크’ 전망대에서 바라본 악양면 평사리 들판. 80여만 평의 광활한 대지와 섬진강 물줄기가 오감을 압도한다. ‘스타웨이하동 스카이워크’ 전망대에서 바라본 악양면 평사리 들판. 80여만 평의 광활한 대지와 섬진강 물줄기가 오감을 압도한다.

봄은 바쁘다. 새싹을 돋우랴, 꽃망울을 틔우랴. 온 자연이 깨어나 분주히 움직이는 계절. 거꾸로, 잠깐 걸음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어 본다. 일상의 에너지를 얻으려면 빠름보다 느림, 느낌표에 앞서 쉼표가 필요하다. 문득 섬진강이 떠올랐다. 바람과 햇살이 쉬어 가는 잔잔한 물결과 눈부신 모래톱. 경상도와 전라도를 나누는 강이면서, 영·호남이 만나는 물줄기. 섬진강과 맞닿은 서부경남의 끝 하동군, 그중에서도 특히 느림과 어울리는 지역이 있다. 전 세계 111번째, 우리나라에서 5번째로 국제슬로시티(Slow City)에 선정된 악양면. 그곳에서 완충(緩充·느린 채움)과 완충(完充·완전한 채움)을 경험했다.


■ 시선 닿는 곳마다 ‘풍경화’ 명작

하동군청 소재지인 하동읍내에서 섬진강 줄기를 거슬러 10여 분쯤 달렸을까. 오른쪽으로 드넓은 들판이 나타난다.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인 악양면 평사리 들판이다.

좀 더 높은 곳에서 조망하려 산으로 향했다. 고소성교차로에서 섬진강대로를 따라 구불구불 산길을 오르면 ‘스타웨이하동 스카이워크’ 전망대가 나타난다. 남동과 남서 방향으로 2개의 뾰족한 뿔이 뻗은 형상으로, 위에서 보면 별을 닮았다. 바닥에 구멍이 숭숭 뚫린 아찔한 길을 따라 남동쪽 전망대에 다다르자 탁 트인 풍광에 절로 입이 벌어진다. 80여만 평에 달하는 광활한 평사리 들판이 오감을 압도한다. 네모 반듯한 논밭이 만든 조각 무늬는 마치 풀로 이어붙인 콜라주 작품을 보는 듯하다.

콜라주의 가장자리,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변을 따라 반짝이는 모래톱은 자연이 빚어낸 또 다른 작품이다. 강을 좀 더 가까이서 내려다보려면 남서쪽 전망대가 좋다. 강 건너 전라도 마을에 흐드러지게 핀 매화가 엎어지면 코 닿을 듯 가깝다.

별모양을 닮은 '스타웨이하동 스카이웨크'의 남동쪽 전망대. 별모양을 닮은 '스타웨이하동 스카이웨크'의 남동쪽 전망대.
전망대에서 30분쯤 위로 올라가면 나타나는 고소성. 성곽 위에 오르면 또 다른 비경이 펼쳐진다. 전망대에서 30분쯤 위로 올라가면 나타나는 고소성. 성곽 위에 오르면 또 다른 비경이 펼쳐진다.

전망대는 섬진강 수면을 기준으로 150m 높이여서 웬만한 강심장도 무섭게 느껴진다. 유료 시설인 만큼 기왕에 용기를 내어 본다면, 발 아래가 훤히 보이는 유리바닥을 배경으로 사진촬영도 도전해 볼 만하다.

좀 더 자연스러운 조망을 원한다면 인근 고소성을 추천한다. 정확한 축조 연대(대가야 또는 신라)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망대보다 높은 해발 220~350m에서 섬진강을 굽어보는 산성이다.

고소성 가는 길은 길진 않지만 경사가 가파르다. 대형버스 주차장과 이어진 등산로는 시작부터 오르막이 끝없이 이어진다. 곧 숨이 차오르고 어느새 이마와 등줄기로 땀이 흐른다. 중간중간 갈림길에서 이정표를 따라 오르길 30분 남짓, 이윽고 눈앞에 돌로 쌓은 산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고소성은 전체 성곽이 마름모꼴로 이어졌다. 폭이 넓어 성곽 위를 걸으며 주변 경치를 관망하기 좋다. 인공적으로 달아낸 전망대와 달리 고소성은 주변 산세와 어우러져, 눈에 담기는 경관 또한 더 자연스럽다.

평사리 들판 한가운데 사이좋게 뿌리내린 '부부송'. 매화나무에 둘러싸여 있다. 평사리 들판 한가운데 사이좋게 뿌리내린 '부부송'. 매화나무에 둘러싸여 있다.
박경리문학관 앞마당에 서 있는 박경리 선생 동상이 멀리 평사리 들판을 바라보고 있다. 박경리문학관 앞마당에 서 있는 박경리 선생 동상이 멀리 평사리 들판을 바라보고 있다.

■ ‘토지’의 생명사상, 들판 한가득 ‘꿈틀’

평사리 들판은 한 걸음 두 걸음 다가갈수록 다른 그림을 선물한다. 평사리 한복판에 위치한 작은 호수인 ‘동정호’는 잎을 길게 늘어뜨린 수양버들을 벗삼아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트 모양의 출렁다리를 건너면 호수의 운치를 만끽할 수 있다.

동정호에서 좀 더 들판 안으로 들어서면 사이좋게 곁에서 뿌리내린 소나무 한 쌍이 나타난다. 평사리 ‘부부송’은 키 낮은 매화나무로 둘러싸여 멀리서 보면 매화 옷을 두른 듯하다. <토지>의 주인공 이름을 따 서희·길상나무로 불리기도 한다.

들판에 계속 마음이 머문다면 인근 박경리문학관도 들러볼 만하다. 소설 <토지> 배경인 최참판댁 여행지 안에 있는 박경리문학관은 박경리 작가 관련 기록물과 이야기를 한데 모은 시설로 2016년 개관했다.

박경리문학관에 전시 중인 선생의 유품. 박경리문학관에 전시 중인 선생의 유품.
대하소설 <토지>의 1부 첫 연재가 실린 1969년 <현대문학> 9월호. 대하소설 <토지>의 1부 첫 연재가 실린 1969년 <현대문학> 9월호.

‘그래, 글기둥 하나 붙들고 여까지 왔네’. 입구 자동문이 열리면 가장 먼저 선생의 글귀가 관람객을 맞는다. 문학관 내부에는 1969년부터 1994년까지 <토지>를 집필하면서 25년 동안 각 신문·잡지사에 실린 연재본과 소설집 등이 전시돼 있다. 1969년 1부 첫 연재가 실린 <현대문학> 9월호의 빛바랜 표지에서 4반세기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세로 원고지에 쓴 육필원고와 돋보기, 안경, 볼펜, 국어사전, 책상 등 유품 40여 점도 전시돼 선생의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다. 개인 소장품을 넘어 한국 문학계의 유산이라 할 만하다.

<토지> 등장인물 형상도, 집필을 시작한 40대 시절 박경리의 초상화, 대형 화폭에 담은 평사리 들판 등 벽면에 내걸린 그림 작품도 인상적이다. 선생을 향한 예술인들의 존경심이 듬뿍 묻어난다.

문학관 마당에는 시·생명·창조 등 선생의 글귀를 돌바닥에 새긴 조형물과 함께 전신 동상이 우두커니 서 있다. 안경 너머로 지그시 선생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평사리 들판이다. 동상 곁에 서서 같은 곳을 바라본다. 선생이 느꼈을 감흥과 영감이 어렴풋이 전해지는 듯하다.

박경리문학관에 전시 중인 유품과 선생의 일대기. 박경리문학관에 전시 중인 유품과 선생의 일대기.
박경리문학관에 걸린 평사리 들판 초대형 그림. 박경리문학관에 걸린 평사리 들판 초대형 그림.

■ 느리게 걷고, 느끼고, 맛보다

악양면은 슬로시티답게 숙소도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오래된 시골집을 리모델링한 민박이 마을마다 있어 쉬엄쉬엄 여행하기 좋다. 취재진이 묵은 하중대마을의 한 숙소(‘소보루’)도 느리게 여행하는 객들 사이에 입소문이 난 곳이다. 깔끔하게 리모델링한 실내와 달리, 바깥은 툇마루와 누마루·아궁이 등 옛집 자태가 그대로다.

각기 다른 시기, 다른 곳에서 온 여행객들은 숙소를 통해 연결된다. 자유롭게 글을 남기는 방명록에는 그동안 다녀간 이들의 사연이 빼곡하다. 휴식과 추억, 반성과 깨달음, 재충전과 다짐의 이야기들이다. 여행팁을 공유하는 메모도 눈에 띈다. 좋았던 여행지, 맛집 등이 수록돼 여행 일정에 참고하기 좋다.

다음 날, 먼저 묵은 여행객들의 추천대로 걸음을 옮겨 본다. 악양에서 가장 오래된 입석마을. 마을의 상징물인 입석(선돌) 바로 옆에 창고를 개조한 ‘마을미술관 선돌’이 자리한다. 작가와 주민들이 협업한 작품을 비롯해 요강, 재봉틀, 소쿠리 등 오래된 생활도구가 전시 중이다. 어르신의 증언, 자연의 소리도 작품이 된다. 공중전화기와 다이얼전화기를 들면 마을에 전해오는 옛날 이야기를 비롯해 악양천 아침 청둥오리, 새벽 섬진강물 등 입석마을만의 소리가 흘러나온다. 마을입구 돌탑, 보호수, 창고 옥상 등 곳곳에 만나는 설치작품도 주민이 참여한 결과물이다.

입석마을 '마을미술관 선돌'에 전시 중인 작품. 전화기 다이얼을 돌리면 수화기 너머로 마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입석마을 '마을미술관 선돌'에 전시 중인 작품. 전화기 다이얼을 돌리면 수화기 너머로 마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덕마을 '골목길갤리러 섬등'에 가면 골목마다 이색적인 작품을 만날 수 있다. 하덕마을 '골목길갤리러 섬등'에 가면 골목마다 이색적인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인근 하덕마을은 골목 전체가 갤러리로 변신했다. ‘골목길갤러리 섬등’이란 이름이 붙어, 마을 곳곳에서 다채로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책 읽는 강아지 조형물, 물레 돌리는 할머니 벽화, 생활도구를 활용한 설치작품 등 골목마다 색다른 작품을 만나는 설렘과 재미가 쏠쏠하다. 한 담벼락에 설치된 ‘느리면 어때?’란 문구가 특히 와닿는다.

경남 하동군 하면 섬진강 재첩과 차(茶)로 유명하지만, 악양면에는 대봉감을 비롯해 다른 먹거리도 풍성하다. 지역 특산주 양조장인 악양주조 바로 앞 솔봉식당은 매콤새콤 양념의 가오리무침과 미역국, 정갈한 찬이 나오는 정식이 입맛을 돋운다. 하동읍내 락원식당은 소머리수육을 전문으로 한다. 날씨에 따라 뜨끈한 소머리곰탕 혹은 시원한 냉면도 별미로 즐길 만하다.

글·사진=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솔봉식당의 ‘솔봉정식’. 매콤새콤한 양념의 가오리 무침을 비롯해 정갈한 찬이 나온다. 솔봉식당의 ‘솔봉정식’. 매콤새콤한 양념의 가오리 무침을 비롯해 정갈한 찬이 나온다.
소머리수육으로 유명한 하동읍내 락원식당의 소머리국밥. 여정 중간 추위를 녹이기에 안성맞춤이다. 소머리수육으로 유명한 하동읍내 락원식당의 소머리국밥. 여정 중간 추위를 녹이기에 안성맞춤이다.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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