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아픈 과거사 기념일 맞기가 겁난다

강병균 논설위원 kb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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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정쟁과 편가르기 수단으로 변질돼
진정한 성찰로 협치·국민 통합 이뤄 내야

올봄에는 벚꽃이 기후변화로 인한 이상 고온 탓에 예년보다 빨리 피는가 싶더니 벌써 전국적으로 ‘벚꽃 엔딩’이다. 앞서 추운 겨울을 이겨 내고 봄소식을 알렸던 하얀 매화와 목련화, 연분홍 진달래꽃, 노란 산수유꽃과 개나리꽃에 대한 기억은 아련하다. 이제는 짙어 가는 신록 속에서 빨강, 분홍, 하양 등 다양한 색상의 철쭉꽃이 경쟁하듯 피어나 여름을 예고한다. 계절의 흐름에 따라 순차적으로 피고 지는 꽃을 보면서 자연의 섭리를 깨닫고, 다음 차례 개화할 또 다른 꽃을 손꼽아 기다리는 재미를 느낀다.

해마다 어김없이 돌아오는 일부 특정한 기념일을 대하는 심정은 이와 사뭇 다르다. 큰 상처를 간직한 그날들을 맞이하기가 고역에 가깝다. 올해 75주년을 맞은 4·3 제주 희생자 추모일과 제63주년 4·19 혁명 기념일이 그랬다. 진보와 보수 양극단으로 나뉜 세력이 기념일의 의미를 되새기기는커녕 진영논리를 앞세운 다툼을 격렬하게 벌이기 일쑤여서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등 여야 정치권은 아픈 과거사를 둘러싸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정쟁을 일삼으며 국론 분열을 부추긴다. 상대방과 다른 사람의 말이나 생각을 형형색색의 꽃과 같은 ‘다름’이 아니라 무조건 ‘틀림’으로 여기며 사생결단식으로 대립할 뿐이다. 국민 화합을 바라는 입장에선 다가오는 43주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념일도 편가르기나 정치 공방의 도구로 전락할 게 우려돼 두렵기만 하다.

3일 제주에서 열린 4·3 희생자 추념식에서 한덕수 국무총리가 윤석열 대통령의 추념사를 대독하고 있다. 연합뉴스 3일 제주에서 열린 4·3 희생자 추념식에서 한덕수 국무총리가 윤석열 대통령의 추념사를 대독하고 있다. 연합뉴스

■4·3, 4·19 둘러싼 정치 공방

이달 3일 제주 4·3평화공원에서 열린 4·3 희생자 추념식에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은 것을 두고 여야 간에 극심한 논란이 빚어졌다. 이날 민주당이 제주에서 개최한 현장 최고위원회 회의는 현 정부와 여당에 대한 성토장과 다름없었다. 추념식에 불참한 윤 대통령과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 등 여권 핵심 지도부를 향해 이구동성으로 강한 비판을 쏟아 낸 것이다. 특히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선거 때마다 제주의 아픔을 닦아 드리겠다고 해놓고 추념식 참석조차 외면하는 모습이 기가 막힌다”고 질타했다. 대통령의 불참에 대한 희생자 유가족의 서운함을 대변한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4·3을 기리지 않는 윤석열 정부’라고 막무가내로 몰아가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이는 윤 대통령이 한덕수 국무총리가 참석해 대독한 추념사를 통해 희생자들과 유가족의 명예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생존 희생자들의 고통과 아픔을 잊지 않고 보듬어 나가겠다고 밝힌 사실을 민주당이 외면한 데서 유추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추념식에 대통령 당선인 자격으로 보수 정당 출신 대통령·당선인 중 처음 참석해 4·3의 아픔 치유를 약속하기도 했다. 민주당의 맹비난에 대해 김재원 국민의힘 최고위원은 지난 4일 대통령이 참석하는 삼일절과 광복절보다 격이 낮은 4·3 기념일의 대통령 불참을 무조건 공격하는 자세는 옳지 않다는 발언으로 논란을 격화시켰다. 대통령의 불참을 두둔하느라 4·3의 격을 따진 게 희생자 유가족에게 상처를 안기는 바람에 제주 도민들과 야당의 반발을 산 것이다.

이어 지난 19일 서울 국립4·19민주묘지에서 개최된 4·19 혁명 기념식의 윤 대통령 기념사가 정치권의 논란과 공방을 낳았다. 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강조해 온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사와 달리 야권을 염두에 둔 듯한 강도 높은 표현이 많아서다. 윤 대통령이 “혁명 열사가 피로써 지켜 낸 자유와 민주주의가 사기꾼에 농락당해선 절대 안 된다”고 언급한 부분은 민주당의 ‘2021년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을 겨냥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와 논란이 됐다. ‘돈에 의한 매수로 민주주의가 도전받을 수 있고, 독재 편을 들면서도 인권 운동가 행세를 한다’는 말은 돈봉투 사건으로 내홍에 빠진 민주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을 겨냥하지 않았느냐는 것. 이날 박성준 민주당 대변인은 국회 브리핑에서 “야당을 선동꾼으로 매도하고 사기꾼으로 칭하고 싶으냐. 기념사를 야당 공격의 수단으로 삼은 점은 매우 유감스럽다”고 지적했다. 이에 유상범 국민의힘 대변인은 민주당의 날선 반응은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이란 논평으로 공방을 벌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19일 서울 4·19민주묘지에서 열린 4·19 혁명 기념식에 앞서 유영봉안소를 참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19일 서울 4·19민주묘지에서 열린 4·19 혁명 기념식에 앞서 유영봉안소를 참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기념일은 ‘갈등·정쟁의 날’?

사사건건 날선 공방을 이어 가는 여야의 거대 양당은 지난 16일 9주기를 맞은 세월호 참사 희생자 추모에 있어서도 온도 차이를 드러냈다. 국민의힘은 국민의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당부한 반면 민주당은 윤석열 정부 출범 첫해인 지난해 10월 29일 발생한 서울 이태원 압사 참사와 연계해 불안전한 사회 시스템과 정부·여당의 무책임성을 부각하는 데 치중했다. 양측의 강성 지지자들도 “세월호를 지겹도록 팔아먹고 있어 너무하다”,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를 애써 외면하려 하며, (국가의) 모습이 달라지지 않았다” 등의 상반된 주장으로 극명한 입장 차를 보인다. 갈등의 골만 깊어지는 대목이다.

상황이 이러한 가운데 다음 달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을 전후해 여야나 진보·보수층 간에 또다시 어떤 싸움이 전개될지 겁부터 난다. 벌써부터 무섭다. 이미 지난달 12일 여당의 김재원 최고위원은 전광훈 목사의 사랑제일교회 예배에 참석한 자리에서 “5·18 정신을 헌법에 넣겠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반대한다”고 말해 야당과 광주 시민들의 분노를 불렀다. 그는 논란이 일자 지난 14일 광주 5·18민주묘지를 비공개 방문해 자신의 발언에 대한 사과의 뜻을 밝혔다. 앞서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여야는 5·18 기념식의 대통령 참석 여부와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합창 문제를 놓고 지속적인 논쟁을 펼치며 대립한 바 있다.

북한의 잇단 서해 도발에 따른 교전에서 전사한 호국영웅들을 기리기 위해 2016년 제정된 ‘서해수호의 날’ 역시 정쟁의 수단이 돼 버렸다. 이날은 2002년 6월 29일 제2 연평해전,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피격사건, 같은 해 11월 23일 연평도 포격전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법정기념일. 매년 3월 넷째 주 금요일 대전 국립현충원에서 기념식이 거행된다. 국민의힘은 윤 대통령의 4‧3 추념식 불참을 향한 야당의 비난이 거세지자 이재명 대표 등 민주당 지도부가 지난달 24일 열린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았다며 역공을 폈다. ‘내로남불’이라고 꼬집은 게다. 문 전 대통령도 임기 동안 이 기념식 참석이 두 번에 그쳐 “북한 눈치를 본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 같은 정치적 이용은 서해수호의 날의 의미를 훼손해 국민의 관심이 다른 보훈 기념일에 비해 훨씬 떨어지고, 유가족을 두 번 울리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오영환 민주당 의원이 10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내년 22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오영환 민주당 의원이 10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내년 22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치 무관심 무당층 급증

5월 23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일과 6·10 민주항쟁, 6·15 남북공동선언도 언제든 진보·보수 간 진영 갈등이나 여야 정쟁을 야기하기 쉬운 날로 꼽힌다. 매년 찾아오는 특정일을 계기로 똑같은 이념·정치 공방을 소모적으로 반복하는 사회와 정치권의 분위기가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되레 상대 진영을 최대한 위기로 몰아넣기 위해 현대사의 주요 과거 사건에 진영논리를 가미하고 정치색을 입혀 더욱 집요하게 정략적으로 활용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최근 들어선 대립과 다툼의 소재가 외교 문제로까지 확산하는 추세에 있다. 특히 한·일 관계에 여야 정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변수나 악재가 많다. 지난달 독도와 강제징용의 역사를 왜곡한 일본 정부의 초등교과서 검정 통과와 2월 다케시마(독도)의 날, 7월 방위백서, 8월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이 그렇다. 야권이 정부의 대일 외교가 굴욕적이라며 여권에 반일 프레임으로 강력히 맞서는 요인들이다.

아무튼 과거사에 얽힌 일부 기념일은 첨예한 논란을 빚으며 사회적·정치적 대립과 다툼의 도구로 변질되고 있다. 기념일이 ‘갈등의 날’ 또는 ‘정쟁의 날’로 전락한 셈이다. 정말 안타까운 모습이다. 이같이 만든 거대 양당의 끝없는 대치는 국민의 피로감을 높이기 마련이다. 지긋지긋한 여야 정쟁으로 날을 지새는 구태를 멈출 줄 모르는 정치를 혐오하고 불신하는 국민이 많은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제는 국민의힘과 민주당에 실망하거나 반감을 갖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다. 정치에 무관심한 무당층과 중도층이 급증하는 이유다. 실제로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 무당층의 비율이 치솟고 있다. 지난 14일 발표된 한국갤럽의 4월 2주 차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무당층 비율은 29%로 나타났다. 같은 시기 정당 지지율은 국민의힘 31%, 민주당 36%다. 같은 여론조사에서 대선 직후인 지난해 4월 2주 차 정당 지지율이 국민의힘 40%, 민주당 39%, 무당층 15%로 조사된 것과 비교하면 불과 1년 새 양당 지지층의 이탈이 늘면서 무당층이 배가량이나 늘어났다.

오죽했으면 지난 10일 젊은 초선인 오영환 민주당 국회의원(경기 의정부갑)이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내년 22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을까 싶다. 오 의원은 “오로지 진영논리에 기대 상대방을 배척하고 악마화하기에 바쁜 정치 현실을 정치인으로서 아무것도 바꾸지 못해 죄송하다”면서 본업인 소방관으로 돌아갈 뜻을 피력했다. 민주당에서 탈당한 뒤 대선 때 윤석열 후보를 지원했던 금태섭 전 의원이 지난 18일 제3 지대 신당 창당을 공식화한 것도 무당층의 증가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신당이 변하지 않는 거대 양당 체제의 한국 정치 구도를 깰 수 있는 교두보가 될 것이라는 그는 내년 4·10 총선에서 극단적인 양당 정치에 거부감을 느끼는 무당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기대하는 모양이다.

3일 국제박람회기구 실사단이 국회에서 '부산엑스포 성공 유치 및 개최를 위한 결의안'을 전달받은 뒤 퇴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3일 국제박람회기구 실사단이 국회에서 '부산엑스포 성공 유치 및 개최를 위한 결의안'을 전달받은 뒤 퇴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여야 협치·국민 통합이 살길

앞으로도 계속 과거사 관련 기념일이 정파적 이익을 얻고 상대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악용돼 국론 분열과 정쟁을 심화해서는 곤란하다. 기념일 제정은 과거 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기억해 공동체를 결속하고 국민의 화합과 통합을 이루자는 미래 지향적인 목적이 있다. 따라서 과거의 아픔을 진정성 있게 되새겨서 현재와 미래를 위한 교훈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처럼 국가적인 에너지를 낭비하는 편가르기나 정쟁에 몰두해 그날의 희생과 정신을 살리는 일이 뒷전이 된다면 기념일은 의미가 퇴색하고 국민에게서 쉽게 잊힐 수밖에 없을 테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희생자의 유가족에게 돌아갈 게 뻔하다. 국가와 국민들이 희생자를 진심으로 추모하고 유가족의 상처를 빨리 낫게 하는 것은 자유와 인권이 살아 있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당연한 일이 아닌가.

이제는 국민의힘과 민주당이 역사적인 아픔과 상처를 정쟁에 이용하는 것을 중단하고 대화와 협력을 지향하며 국민 화합에 앞장서야 할 때다. 여야는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음을 최근 국내외에 보여 주기도 했다. 지난 2~7일 2030월드엑스포를 유치하려는 부산에서 현지 실사를 벌인 국제박람회기구(BIE) 실사단에게 한마음 한뜻으로 똘똘 뭉친 여야의 유치 열망을 각인시켰다. 실사단이 지난 3일 국회를 방문했을 때 여야는 본회의에서 ‘부산엑스포 성공적 유치 및 개최를 위한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고 실사단에게 전달함으로써 큰 감명을 안겼을 정도다.

여야가 이처럼 감동적인 협치 정신을 발휘해야 할 현안과 과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복합적인 경제 위기 극복과 민생 안정 등을 위해 여야가 대화하고 머리를 맞대는 노력이 절실하다. 밖으로는 북한의 핵 위협 수위가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되고 미·중 세계 패권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 4대 열강 사이에 낀 우리나라의 단합된 모습과 통일된 국론이 요구된다. 국가 안보와 번영을 확보하는 길은 여야 협치와 국민 통합뿐이다. 이를 위해 아픈 과거사 기념일의 의미를 올바르게 성찰해 화합을 다지는 일에서부터 새롭게 출발할 필요가 있다.

강병균 논설위원 강병균 논설위원


강병균 논설위원 kb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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