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힘센 언니’들이 온다
JTBC 드라마 ‘대행사’ 포스터
■카리스마 언니들 전성시대
최근 드라마와 영화는 한마디로 ‘힘센 언니’의 전성시대다. 전업주부와 헌신적인 엄마, 연인 등 조연에 머물던 여성들이 청부살인업자, 광고회사 대표, 노동인권 변호사, 재벌, 정치인 등으로 주연을 맡아 여성의 스토리를 끌어가고 있다. 여성 서사 드라마가 잇따라 인기를 끌면서 ‘흥행 성공 공식’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전까지 작품에서 다뤄지는 여성 캐릭터는 남성 캐릭터를 돋보이게 만들기 위한 보조 역할에 불과했지만, 그런 편견을 깨부수듯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여성 캐릭터와 이야기는 대중의 공감과 관심으로 이어져 새로운 여성 서사 작품이 증가하는 원인이 됐다. 대중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여성의 입지를 굳히고,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모습에 힘을 얻기도 한다.
드라마 ‘퀸메이커’ 스틸컷
■원톱으로 떠오른 여성들
드라마 ‘퀸 메이커’가 화제다. ‘킹 메이커’라는 말은 있지만 ‘퀸 메이커’라는 말은 없다. 정치나 권력은 전통적으로 남성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재벌그룹 오너의 해결사인 전략기획실 출신 황도희(김희애 분)가 인권 변호사 오경숙(문소리 분)을 서울시장으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담은 내용이다. 김희애, 문소리뿐 아니라 다양한 힘센 언니들이 대거 등장한다. 정·재계와 검찰·언론 등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재벌그룹 회장도 여성이고, 그 아래서 경영권을 놓고 싸우는 이들도 자매다. 또한 “나쁜 년이 나쁜 짓 한 거랑, 좋은 년이 나쁜 짓 한 건 천지 차이야”라며 욕설을 퍼붓고, 비열하게 공격하는 3선 출신 국회의원 서민정도 여성이다.
‘퀸 메이커’를 연출한 오진석 감독은 언론 인터뷰에서 “강한 여성들이 전통적으로 남성이 주를 이뤄 온 권력 세계에 정면으로 맞서 충돌하고 부딪히는 점이 새롭다”며 “전혀 다른 성격의 여성들이 충돌하고 연대하는 과정이 관전 포인트가 되고 있다”고 밝혔다.
‘퀸 메이커’ 스틸컷
드라마 ‘대행사’는 대기업에 속한 워킹우먼들의 다양한 고군분투를 담은 여성 서사다. 흙수저 고아인(이보영 분)이 VC그룹 최초로 광고대행사 여성 임원이 돼 대표 위치까지 가는 모습을 처절하면서도 우아하게 풀었다. ‘대행사’에서는 사내 정치 싸움에서 생존하기 위해 분투하는 고아인을 비롯해 오빠와 VC그룹 경영권을 다투는 여동생 강한나도 등장한다. 강한나의 모습에서 남성 위주 기업 오너가 지배 구도에 서서히 생기는 균열을 암시한다. 이들 이에도 육아와 일을 병행하면서 자신이 원했던 삶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카피라이터 조은정의 모습도 열정적으로 펼쳐진다.
눈길을 끄는 것은 강한나가 재벌 오너의 딸 자격으로 처음 출근할 때나, 고아인이 승진해 사장이 됐을 때도 꽃다발을 가져다주는 사람은 전통적
인 여자가 아니라 남자 직원이었다는 점이다. ‘꽃은 여자가 줘야지’라는 오래된 관습을 통렬히 깨뜨린다. 또한, 강한나의 친구들이자, 재벌가 여성 후계자들이 수시로 뭉치는 장면에도 재벌가에 부는 미묘한 여풍을 느끼게 한다. 액션 대작 ‘길복순’ 또한 전도연이 원톱으로 나섰다. 국내 최고의 청부살인업체의 에이스이자 딸 엄마인 길복순이 능력은 능력대로 인정받으며 딸과 가까워지기 위해서 애쓰는 엄마로 등장해 이야기를 끌어간다.
드라마 ‘대행사’ 스틸컷
대중문화 전문가인 원숙경 박사(언론학)는 “7080세대 고등교육이 늘고 1990년대부터 여성운동을 경험한 세대가 사회로 진출하면서 성별이 사회적 지위를 구분하는 시기에서 점점 벗어나는 현상이 대중매체를 통해 재현되는 과정”이라고 지적했다. 원 교수는 “미디어 시장에서 여성의 이야기를 간절히 바라는 소비자층이 두터워졌다는 점이 추세로 증명된 셈”이라면서 “이런 여성 서사가 조금씩 사회에 자극을 주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넷플릭스 영화 ‘길복순’ 포스터
■재벌가 딸들의 전쟁, 경영권 분쟁 나서
이런 현상은 재벌가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LG그룹이 75년 만에 재산을 놓고 아들과 딸이 나뉘어 싸우는 양상이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의 모친 김영식 여사와 여동생 구연경 LG복지재단 대표, 구연수 씨가 서울서부지법에 구 회장을 상대로 상속회복청구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실제로 법조계에 따르면 재벌가는 물론이고 중견기업 등에서 딸이 아들에게 넘어간 경영권을 놓고 분쟁을 벌이는 소송도 잦아지고 있다. 2019년 고 조양호 한진그룹 전 회장의 장녀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남동생 조원태 회장을 상대로 경영권 분쟁을 벌였다. 조양호 전 회장의 3남매는 법적 상속 비율에 따라 6.52%(조원태), 6.49%(조현아), 6.47%(조현민)의 지분을 물려받았다. LG그룹과는 다르게, 공평한 상속이었지만 오히려 경영권이 문제가 된 상황이다.
재계에서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 이런 상속 갈등은 결국 시대가 변화하고 남성뿐 아니라 여성들의 사회 진출도 늘어나면서 '딸들의 경영권 요구'가 더 많아지는 흐름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와는 결이 약간은 다르지만, 지역 중소기업 오너가에도 기업주인 아버지의 사고나, 해외에 거주하는 아들이 상속을 포기하면서 딸이 기업을 물려받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일부에서는 ‘급작스러운 상속’으로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지만, 가족 형태의 변화에 따라 ‘아들=사업, 딸=결혼’이란 등식이 깨지는 흐름도 만연하는 실정이다.
그룹 경영권을 둘러싼 남매간 갈등을 벌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왼쪽)과 동생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연합뉴스
■여성, 변호사·공무원 진출 급등
2023년 공무원 선발시험 최종 합격자에서 5급 행정직 여성 합격자는 43%, 외교관 후보자 여성 합격자는 63%를 각각 차지했다. 2023년 서울시교육청이 2023년도 제1회 서울시교육청 지방공무원 9급 임용시험에는 응시자 4341명 중에서 여성 69%로 남성 31%보다 2배가량 많았다. 실제로 전국 초등교사 77%가 여성, 남성 교사 없는 학교가 전국 107곳에 이를 정도이다. 서서히 여성 공직 사회에서 신입 직원을 중심으로 여풍 현상이 번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추세를 반영해 2021년 지방직 공채 여성 합격자 수는 1만 3062명으로 전체 합격자 수(2만 2266명) 대비 60%를 넘은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직 중에서는 변호사 업계에서 여성 약진이 뚜렷하다. 2022년 변호사시험 합격자 남녀 비율은 남자 951명, 여자 761명이다. 여자 합격자는 2012년 첫 변호사 시험에서 41%에 그쳤지만, 2022년에는 44.5%로 3.5%포인트 증가했다. 실제로 부산지방변호사회 변호사 1000여 명 중에서 266명이 여성이다. 전국적으로도 여성 변호사 비율은 26%에 이른다.
염정욱 부산지방변호사회 회장은 “여성·청년 회원이 많이 증가함에 따라 이들의 목소리를 잘 반영하기 위해, 집행부 여성 비율을 13명 중 5명으로 구성했다”면서 “30~40대로 갈수록 여성 변호사 비율이 높아지면서 법조계 문화도 바뀌어 가는 양상”이라고 밝혔다.
■고위직, 관리직은 여전히 미진
전국적으로도 여성 변호사가 늘어났지만, 로펌에서 ‘임원’이라 할 수 있는 파트너 변호사 중 여성 비율을 10명 중 1명꼴로 나타났다. 로펌의 남성 선호와 여성의 출산·육아 부담에 따른 경력 단절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여성 공무원 증가세에도 중앙 정부의 최고 관리직(1·2급) 중 여성 비율은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OECD 33개국 중 두 번째로 낮은 수준이다. 4급 이상 국가 공무원 중 여성 비율도 19.7%에 그쳤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2021년 지방자치단체 5급 이상 공무원 중 여성 비율은 24.3%로 조사됐다. 2010년(8.6%)과 비교했을 때 늘어난 수치지만, 여전히 4명 중 1명에 불과한 수치다. 지난해 광역자치단체장 중 여성은 한 명도 없었다. 기초자치단체장은 7명(3.1%)에 불과했다. 정치에서도 여성의 대표성이 제고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올라갈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나아갈 수 없는 투명한 유리 천장’이 곳곳에 놓여 있는 양상이다.
‘대행사’ 스틸컷
■대기업은 천장이 뚜렷
대기업은 여전히 유리 천장이 뚜렷이 보일 정도다. 국내 주간지가 재계 20위권 대기업 중 10곳의 임원 직급에서의 여성 비율은 5.6%에 불과했다. 삼성전자의 여성 임원 비율은 2019년 6.3%에서 2020년 6.3%, 2021년 6.5%로 제자리걸음이다. 같은 기간 신세계(12.1%, 7.1%, 11.8%)와 롯데(7.8%, 6.8%, 9.8%), 포스코(2.6%, 3.7%, 2.5%)의 여성 임원 비율은 밑바닥을 맴돌았다. 그동안 ‘여성 인재 양성’을 강조한 사실이 어색할 정도다. 여전히 유리 천장은 견고한 모양새다.
부산지방변호사회 홍보이사를 맡고 있는 박수경 변호사는 그 이유로 “관리자급으로 많이 진출해야 여성 임원 비율도 높아지는데, 일반 기업의 경우 출산과 육아 등의 문제로 퇴사하는 경우가 많아 경력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박 변호사는 “여성들이 가능한 사회활동을 오랫동안 하고 싶어서 전문직과 공무원으로 몰리는 이유가 크다”면서 “기업에서 유연근무제 등 자유로운 근무 분위기 조성이 여성의 사회활동을 위해 더욱 필요하다”라고 밝혔다.
■유리 천장에 실금이라도 내려면
여성 변호사와 공무원, 교사가 늘고, 기업에도 여성 오너들이 부쩍 눈에 띄지만, 여전히 수많은 ‘딸들’에겐 유리 천장이 높고, 두껍게만 느껴진다. 오히려 여성이 사회 활동을 위해 집중적으로 몰린 변호사, 의료계, 공무원의 여성 비율이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처한 현실을 오판하게 하는 ‘착시 현상’마저 일으킨다는 지적이다. 실제로는 경력 단절과 성별에 따른 임금 차별 등 유리 천장에 실금은커녕 닿지도 못하고 낙마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여성 본인은 물론이지만, 기업과 사회의 노력이 절실하다. 유행하는 ‘힘센 여성들의 서사’가 단순한 유행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대세로 자리잡도록 사회가 호응할 때이다.
드라마 ‘대행사’에서 고아인은 “왜 내 한계를 네 멋대로 결정하지”라고 일갈한다. 마찬가지로 “왜 여성의 한계를 네 멋대로 결정하지?”라고 호통치는 ‘딸들’의 모습을 상상할수록 통쾌해진다. 이제 이 질문을 우리 가슴에 던질 차례다. 우리 사회가 그 이유를 설명할 순서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