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퍼스트레이디’ 법제화 필요한가
김건희 여사 '광폭 행보' 정치권 공방 가열
대통령 배우자 '공적 역할' 문제 수면 위로
다층적 정체성 사회·학술적 논의 필요한 때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맨 오른쪽) 여사가 4월 24일(현지시간) 워싱턴DC 백악관 영빈관에서 테드 서랜도스 넷플릭스 공동 최고경영자와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 배우자인 김건희 여사의 잇단 ‘광폭 행보’를 놓고 말들이 많다. 대통령 임기 초기 조용히 내조만 하겠다는 다짐을 잊고 선을 넘고 있다는 비판이 잇따른다. 최근에는 정치권 공방이 가열되면서 퍼스트레이디 법안을 주장하는 목소리까지 분출하는 상황이다. 퍼스트레이디 역할과 의무를 규정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 위상을 사적 관계로 한정하느냐, 공적 지위를 어디까지 수용하느냐는 정체성의 딜레마가 엄연하기 때문이다. 퍼스트레이디의 역할은 과연 어디까지 인정해야 할까.
■ 핫이슈 떠오른 ‘퍼스트레이디’
최근 김건희 여사의 대외 활동이 부쩍 늘어났다. 지난달 납북자 가족을 만나 정치적인 말들을 하고 미국 방문 중에는 넷플릭스로부터 한국 투자 상황을 보고받는 등 일련의 언행들이 연일 언론을 타고 입길에 오르내리고 있다. 앞서 3월 말부터 4월 17일까지 공식적으로 공개된 단독 일정이 14건에 달했다는 보도도 나온 바 있다. 이쯤 되면 대통령 일정보다 더 많다는 주장까지 나오는 마당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문제는 여야 정치권의 거친 말싸움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은 대통령 배우자 역할을 규정하는 대통령 배우자 법안을 발의하겠다고 선제적 움직임을 보였다. 김민석 의원은 27일 “퍼스트레이디의 활동을 시중의 농거리로 놔두기보다는 정상적인 국정 시스템 속에서 다뤄 가야 한다”고 했다. 국민의힘은 거세게 반발했다. 성일종 의원은 “영부인의 역할에 대한 법적 규정은 없다. 영부인을 약한 고리로 보고 공격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맞받았다.
여기에 더해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과거 발언도 소환됐다. 2021년 “퍼스트레이디는 폼으로 있는 게 아니라, 부인 외교도 있는 것”이라고 언급한 대목이다. 김 여사의 대외 활동이 촉매가 돼 퍼스트레이디를 둘러싼 공방이 정치권을 달구는 형국이다.
■ 대선 후보 선택까지 영향력
퍼스트레이디(First Lady·令夫人)는 선출직이 아니다. 그렇다고 임명되는 것도 아니다. 대통령 당선과 더불어 배우자에게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역할이다. 국가 최고 지도자의 부인으로서 국민의 소리를 바로 듣고 남편에게 적극적으로 조언하는 제1 참모이자 정치적 동반자로서의 역할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견이 없다. 하지만 퍼스트레이디가 대통령의 일에 노골적으로 개입하는 것 또한 혐오를 일으킨다.
지난 2006년 행정학회 발표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바람직한 퍼스트레이디 스타일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사회봉사에 헌신하는 이미지’(48.4%)가 가장 많았고, ‘전문적인 자기 영역을 갖는 적극적인 이미지’(21.6%), ‘대통령의 정치 및 국정 운영의 동반자로서의 이미지’(15.4%)가 뒤를 이었다.
퍼스트레이디에 대한 시각은 시대 흐름에 따라 변화했다. 조용한 내조자의 역할에서 전문적인 조언자, 혹은 직접 정치에 나서는 대통령의 정치적 파트너에 이르기까지 배우자의 역할에 대한 기대는 바뀌고 있는 것이다.
2021년 SBS 여론조사 결과는 흥미롭다. 대선 후보의 배우자가 후보 선택에 영향을 준다는 응답이 무려 60.4%에 달했다. 게다가 지지 후보를 교체할 의사가 있다는 응답자 중 65.2%가 배우자의 영향을 이유로 들었다. 이제는 배우자가 대선 후보자의 지지율에 중요 변수가 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대통령의 취임 이후에도 대통령 배우자의 의상과 외모, 언행은 언론의 큰 주목을 받는다.
1993년 당시 미국의 퍼스트레이디로서 국민건강보험안 개혁을 주도하던 힐러리 클린턴.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의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캠페인을 하는 모습이다. AP연합
■ 우리나라 퍼스트레이디 역할?
퍼스트레이디는 국가 최고 결정권자와 함께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적 지위가 있다. 그에 걸맞은 도덕성과 책임성, 정무적 감각, 정책 전문성까지 요구된다. 그렇다면 시대 흐름에 맞는 퍼스트레이디의 구체적 역할과 위상은 대체 무엇인가.
2007년 대통령비서실에서 제출한 자료가 있다. 퍼스트레이디의 공식 활동은 첫째 대통령 내외 공식 일정 일부 수행, 둘째 대통령 해외순방 동행 및 방한 외빈 접견, 셋째 청소년·여성 관련 행사 일부 참석이다. 제2부속실 업무는 ‘영부인의 일정 및 행사기획, 집행’과 ‘영부인 활동 수행 및 비서 업무’ ‘영부인 활동 대내외 네트워크 및 비서 활동’ ‘관저 생활 보좌’로 명시돼 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 역할 규정이 대단히 추상적이고 모호하다. 퍼스트레이디의 역할과 임무·활동 범위를 담은 업무 지침이나 매뉴얼이 없고, 법적인 근거 또한 없다는 게 핵심이다. 대통령 배우자의 활동에 대한 기록이나 보존에 대해서도 공식적으로 명시되거나 의무화된 것이 없다.
그나마 퍼스트레이디 업무를 담당하던 제2부속실이 윤 대통령 취임 이후 조직 슬림화 방침에 따라 사라졌다. 공적으로 위임받은 지위가 아니라는 점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동안 제2부속실은 대통령 배우자의 관리와 활동 기획, 그리고 그에 따르는 예산 소요 등과 관련된 일을 담당했다. 법적 근거가 약한 대통령령에 기초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지금은 예산이 따로 잡힌 게 없고 여사 관련 행사는 영수증을 내면 대통령실에서 처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부속실이 없으니 대통령실에 부담이 가는 건 당연하다. 일정이 생기면 출발부터 복귀까지 많은 지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막상 문제가 발생할 경우 책임 소재가 명확치 않은 측면도 있다. 제2부속실 부활 여론이 지속적으로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공적 역할 인정하는 미국
미국은 대통령 배우자를 ‘퍼스트레이디’로 부르며 사실상 국가적 대표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역사상 많은 퍼스트레이디가 정책 사업에 관여하거나 언론과 소통하는 등 정치 활동을 벌였다. 국민건강보험안 개혁을 주도하며 관료의 역할을 다한 힐러리 클린턴이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미국 연방법전(USC) 제3편 105조에 이런 내용이 명시돼 있다. ‘대통령의 의무와 책임을 수행하는 데 있어 대통령의 배우자가 대통령을 지원하는 경우, 대통령에 부여되는 지원 및 서비스가 대통령의 배우자에게도 부여된다.’ 이 규정은 퍼스트레이디가 물리적인 사무실과 보좌관, 비서, 예산을 부여받는 실질적인 제도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퍼스트레이디를 대통령의 조력자로서 공적 인물로 인식한다는 뜻이겠다.
실제로 백악관 안에는 퍼스트레이디실이 존재한다고 한다. 이 분야 전문가에 따르면, 비서실장·대변인·홍보국장·행사비서관 등이 있고, 공식 일정은 사전에 공개되는데 백악관 풀 기자단의 취재를 통해 시작부터 종료 때까지 실시간 전송된다.
한편 미국 연방법 조항이 퍼스트레이디의 공적 지위를 인정하는 뜻은 아니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대통령의 배우자는 어디까지나 사적 관계에서 비롯된 존재이고 임명된 지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가 4월 26일(현지시간)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열린 국빈 만찬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내외와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사회적, 학술적 논의 이뤄져야
우리나라 역시 퍼스트레이디의 공적 역할이 불가피해졌다. 내조에만 충실해야 한다는 시각도 어쩌면 시대착오적이다. 퍼스트레이디의 공적 정체성에 무게를 둔다면 그 역할을 제도화하는 게 맞다. 인적 자원의 활용이라는 측면에서도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경우 의전과 예우는 있지만 법적 책임과 권한이 없다. 늦기 전에 법적 근거를 갖는 지원 조직을 설치해 퍼스트레이디의 활동이 투명하고 책임 있게 수행되도록 지원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야 정치권이 협치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
대통령 배우자의 역할과 영향력에 주목하는 또 다른 이유는 권력 남용과 사유화, 정치적 개입으로 인한 국정 난맥 등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우린 이미 비슷한 경험을 겪었다. 대통령 배우자를 둘러싼 비공식적인 정치권력은 엄연한데 교정하거나 통제할 수단은 부족하다. 그래서 스캔들을 낳고 정쟁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퍼스트레이디의 정체성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배우자 이전의 한 독립된 주체와 얽혀 있는 문제라서다. 대통령 배우자는 다면적인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 물론 어떤 경우에든 그에 준하는 책임성과 도덕성을 확보하는 제도적 장치는 있어야 한다. 하나의 관점이 아니라 다양한 시각에서의 학술적,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발전적 논의를 통해 긍정적이고 구체적인 모델을 만드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