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나는 미래에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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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 소설가

5월의 날씨가 싱그럽다. 한바탕 비가 쏟아진 뒤라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도 한결 선명하다. 게다가 소복하게 돋아난 연두의 물결이 은근히 넋을 빼놓는다. 턱 괴고 멍하니 창밖을 쳐다보고 있자니 또 쓸데없는 상상병이 도진다. 만약에, 내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만약에, 라는 가정으로 따지고 들면 뭐든 피곤해지는 법인데, 이런 건 나름 재미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나만 이런 상상을 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요즘엔 과거로 회귀하는 드라마나 웹툰도 인기가 많다. 절망에 허덕이던 주인공이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척척 해결해내는 이야기는 재미있을 수밖에 없다. 과거의 실수를 만회하고, 자신만 아는 그 시절의 정보를 이용한다면 천하무적이 된 기분일 것이다.

한데, 정말로 타임머신을 만들 수 있을까? 지금은 불가능할 것 같다. 하지만, 과학이 아주 발전한 미래, 수백 수천 년 뒤에는 가능하지 않을까? 현명한 인류가 핵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기후변화를 극복하고, 느닷없이 혜성이 떨어지거나, 어느 연구실에서 좀비 바이러스가 유출되는 일도 없고, 인공지능 시스템을 안전하게 통제해서, 인류가 여전히 번영한다면 말이다.

아인슈타인은 빛의 속도로 달리면 시간을 거스를 수 있다고 했다. 혹은 중력장에 따라 시간과 공간이 휘어진다 말하기도 한다. 어설프게 책을 뒤적여 볼수록 시간이라는 단어가 헷갈리고 어렵다.

‘시간’이라는 것은 원래 없는 것인데, 끊임없이 변하는 현재 상태로 인해 지어낸 개념이라는 말도 있다. 변하는 것이 없으면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니 그럴듯하다. 아무리 견고한 물질도 백 년, 천 년이 지나면 변질된다. 아무리 치워도 며칠만 지나면 어질러져 있는 내 책상 위처럼 말이다. 이런 것을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라 한단다. 저절로 섞이고 무질서해지는 현상. 그래서 학자들은 시간을 엔트로피 증가의 또 다른 표현 방식이라 말하기도 한다.

아무튼, 엔트로피를 되돌리든, 다른 차원을 찾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은 과학자들이 고민할 일이다. 나는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이론으로 재미있는 상상만 하면 된다. 시작한 김에 당장 과거로 돌아가 보자.

30대 초반 정도가 좋겠다. 소중한 나의 아이들이 태어났고, 가장 변화무쌍했던 시절이었다. 사업하겠다며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가 덜컥 앞이 막혀버렸던 시절. 조금 더 숙고하고, 조금만 더 살펴봤으면 미래가 달라졌을 시기.

나는 과거의 어느 날, 30대로 젊어진 내가 번쩍 나타나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그런데… 과거의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방금, 미래에서 뚝 떨어져 왔다는 것도 모른 채 대출금액을 걱정하며 은행 출입문을 당길 것이다.

엔트로피를 되돌린다는 것은 내가 몸담은 우주 모든 것을 되돌린다는 의미다. 당연히 내 머릿속에 쌓인 기억도 과거 시점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나는 미래에서 왔음을 결코 자각할 수 없다. 이럴 바에야 뭐 하러 과거로 돌아갔나 싶다. 하지만, 먼 미래의 어떤 이들에겐 과거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는 삶 자체가 소중하고, 절박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비싼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과거로의 여행을 갈망했을 것이다.

버스 정류장 앞에 어깨를 축 늘어뜨린 청년도, 무인 ATM에서 몇만 원의 지폐를 인출하는 후줄근한 옷차림의 여자도 이제 막 도착한 미래인일 수 있다. 다만, 자신이 미래에서 왔음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그러니,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나 또한 먼 미래에서 왔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미래의 나는 무슨 절박한 이유로 지금 여기로 돌아왔을까? 무엇을 되돌리려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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