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고립청년 K에게

박세익 기자 ru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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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익 기획취재부장

청년 맞닥뜨린 ‘취업 지옥’ 대한민국
코로나19 이후 고립청년 크게 늘어

일 할 의지·삶의 희망 상실한 청년들
이대로 두면 대한민국 미래도 없어

성공·경쟁 사회 구조적 한계 딛고
버티고 살아남아 세상 주인공 되길

올여름에도 어김없이 장마가 찾아왔네요. 무탈하게 잘 지내는지요. K를 처음 만난 토론회 뒤풀이가 벌써 8년 전이니, 세월 참 빠릅니다.

부산의 한 국립대에서 이른바 ‘인 서울 대학’ 편입에 성공한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나요.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찾아, 꿈을 찾아 나선 20대 청춘은 누구보다 발랄하고 생기가 넘쳤어요.

그러다 몇달 전 “부산 집에서 쉬고 있다”는 K의 근황을 전해들었을 때, 복잡한 마음 숨길 수 없었습니다. 섣부르게 이러니저러니 할 일은 분명 아니겠지만 어떻게든 힘을 보태고 싶었어요.

‘취준 생활’에 들어간 졸업 이후에도 많은 돈이 드는 서울 생활이 이어졌다지요. 악화되는 경제 위기 속에 설상가상으로 코로나19까지 터져 버렸으니.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며 힘겹게 준비한 ‘스펙’보다 당장 성과를 내는 ‘경력’을 선호하는 채용 시장으로 급격히 변해갔고, 기업들도 인원을 확 줄이거나 아예 채용문을 닫아 버렸어요. 급한 마음에 조그만 직장에 발도 들였지만 말도 안 되는 처우에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나이는 어느덧 서른. 몸도 마음도 지쳐 ‘번 아웃’이 오고야 말았던 걸까요. 취업하고 결혼도 하는 ‘성공 스토리’가 들릴 때마다 주변 시선이 더 무겁게 느껴졌겠지요. 그런 시선에 나를 가두기 시작하면, 고립이 시작될 겁니다.

세상은 K같은 이들을 ‘고립청년’이라 부르기 시작했어요. 일 할 의지가 없는 청년 무직자 ‘니트(NEET)족’부터 심할 경우 장기간 칩거하는 ‘은둔형 외톨이’라는 말까지 붙이고,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고립청년이 엄청 늘었다는 전문가 경고까지 더해서요. 부산에만 최대 2만 2000명이 넘는 은둔형 외톨이가 있을 거라는 조사 결과도 있어요.

하지만 생각해 보면, 청년에게 대체 무슨 잘못이 있을까요. 고립된 청년을 경쟁의 낙오자, 인생의 패배자로 여기는 이 사회가 구조적인 모순 덩어리 아닐지.

매년 그 많은 대학의 졸업자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드러나는 걸 대학과 우리 사회가 두려워 하는 건 아닐까요. 이미 만족할 일자리가 턱없이 부족하고, 4차 산업혁명을 거치며 일자리에도 대격변이 일어난 현실을 알면서도 70%가 넘는 학생들이 차별 받지 않으려고 여전히 4년제 대학에 진학하는 걸 방치하는 건 아닐까요.

인구가 계속 늘고 있는 미국의 대학, 대학원생을 가까이에서 관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직도 그들의 열정적인 눈빛이 잊혀지지 않아요. ‘왜 공부하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명확하게 알고 치열하게 토론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지요. 좋은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그들이 무척 행복해 보였어요.

대한민국 경제력이 세계 10위권 이내에 진입했다고 자랑하지요. 그런데 유엔이 올해 발표한 ‘세계 행복 보고서’상 한국의 행복 순위는 57위에 불과해요. 부동의 1위 핀란드와 57위 대한민국은 공부 잘 하는 나라로 이름을 날리지만, 국민이 느끼는 행복은 극명하게 엇갈리는 겁니다. 불평등 속에 청년이 행복하지 않은 나라, 청년이 될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나라의 미래가 과연 밝기만 할까요.

대한민국의 주요 이슈는 ‘정치 프레임 블랙홀’에서 허우적거리는 것 같습니다. 수능 ‘킬러 문항’을 두고 온 나라가 떠들썩하지만, 교육을 근본적으로 바꿔보자고 토론하고 실천하는 장은 전혀 열리지 않아요. 정치는 더 퇴보하고, 존경 받는 어른과 리더십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고립청년 문제가 심각하다니 또 대책들이 나오겠지요. 연구용역을 수행하고, 조례 제정으로 각종 센터를 만들어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식상한 내용일 테지요. 그런다고 근본적인 변화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힘들겠지만, 지금 K에게 ‘어떻게든 버티고, 조금만 더 힘을 내어 보라’고 말할 수밖에 없네요. 파편화되고 모래알처럼 흩어져 버린 불확실성의 시대를 모두 살아가고 있어요. 국민 중 3200만 명을 넘게 감염시키고도 아직 진행 중인 코로나19 말고도, 또 어떤 강력한 감염병과 기후변화가 우리를 괴롭힐지 아무도 모릅니다. 사회의 기둥인 학교에서 교사들은 이탈하고, 의대 입시 경쟁은 역대급인데 지역 병원의 필수 의료진은 태부족인 모순이 금방 해결될 수 있을까요.

그러니 이제 청년들이 소수만을 위한 선진국 말고, 우리의 행복 순위를 올려달라고, 개천에서 용 나는 세상 다시 만들어 달라고 힘을 모아야 합니다. 자살률 부동의 세계 1위 같은 치욕이 아닌, 대한민국 고립청년들에게 ‘행복 나침반’을 돌려달라고 말해야 합니다. 어쩌면 함께 손을 잡아줄 건강한 이들이 숨어 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부디 어려움을 잘 이겨내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K의 건투를 빕니다.


박세익 기자 ru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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