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산골책방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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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시인

강화도 고려산 낙조대 적석사 아랫마을에 있는 우공책방. 우공책방 제공 강화도 고려산 낙조대 적석사 아랫마을에 있는 우공책방. 우공책방 제공

강화도 산골에 작은 책방이 있다. 서해 노을이 좋은 적석사 비탈 아래다. 이런 오지에 책방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인데, 그래서 책방 이름이 ‘우공(愚公)’이다.

북스테이를 겸하고 있는 우공책방에서 나는 가끔 책을 읽고 시를 쓴다. 책방이 자연스럽게 작업실로 바뀐다. 밤이면 일찌감치 소등을 하는 산중인지라 책상 등만 켠 뒤 어둠을 최대한 근접시켜서 창가에 내린 별이 등불이 될 수 있도록 한다. 아침은 자작나무에 앉길 좋아하는 물까치 소리가 자명종이 되어 눈을 뜬다. 주인 내외는 수익금의 일부로 산새들의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마당의 탁자 위에 올려놓은 식빵을 들기 위해 모여든 산새 소리는 양쪽 귀에 소리의 무지개를 걸어 준다.

강화도 오지에 있는 우공책방

풍요로운 책 생태계 형성 기여

지역 공동체 환대 문화의 현장

지역서점 지원하는 내년 예산

전액 삭감되었다는 우울한 소식

작년 가을에 낸 내 시집이 우공책방에서 무려 백 권 가까이 팔렸다는 후문이다. 인터넷 서점 마케팅이나 도서관 등과 연계된 북콘서트 같은 흔한 홍보 전략 한 번 써 본 적 없는 출판사로선 적이 경이로워하거나 당황스러워할 만한 일이라고 하겠다. 새 시집을 내면 영향력 있는 SNS 스타들과 서평을 써 줄 문예지 편집위원단 그리고 문학상 단골 심사위원들에게 인사 삼아 증정본을 보내는 것이 관례이건만 그마저 생략하였는데 어찌 된 일인가.

우공책방의 주인들은 동병상련의 유사한 처지에 있는 전국 지역 단위의 작은 책방 연합회를 통해 자신들이 사랑하는 작가들을 적극 홍보한다. 직접 찾아오는 독자들에겐 대형 도서 유통 시장에서 밀려난 작가들의 책을 은근히 강권하는 데서 보람을 찾기도 한다. 서점의 베스트셀러 순위나 매대에서 일찌감치 잊힌 작가들을 기억할 때 책의 생태계가 훨씬 풍요로워지고 우리의 정신세계 역시 다양성을 갖게 된다고 역설하는 이 작은 책방엔 여느 서점들에선 볼 수 없는 그윽한 향기가 머문다. 일정 기간 주문량이 없으면 반품되거나 폐기될 운명의 책들이 이 작은 책방을 통해 생명을 이어 가고 있는 것이다.

문예지의 서평 하나 받지 못한 시집이 몇몇 문학상 후보에 오르내리다가 덜컥, 수상까지 하게 되자 그냥 지나칠 수 없다며 우공책방에서 연락이 왔다. 우리끼리라도 수상 기념 북콘서트를 열자는 것이었다. 지역서점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그간의 재능기부에 대한 인사가 되었으면 하는 뜻이 고마워 선뜻 길을 나섰다.

특강이 있는 날이면 은성한 마을 축제가 벌어진다. 읍내에서 시를 쓰며 ‘젓국갈비집’을 운영하는 여사장님이 뒤풀이를 준비하는 동안 누군가는 손수 빚은 막걸리를 들고 온다. 인근 섬에서 온 어부는 숭어회를 펼쳐 놓는다. 귀농을 한 마을 사람들의 옥수수와 고구마가 오르고, 가져올 것이 마땅찮아 집 앞에 핀 들꽃을 꺾어 만든 환영 화환까지 받게 되면 북콘서트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이 서로를 향해 귀를 열고 경청하는 환대의 자리가 된다. 여기서 강화의 대소사가 오가고, 저마다의 근황이 오간다. 강화를 고향으로 한 이들과 강화에 귀향을 한 이들, 우연히 들른 여행자들까지 함께하는 이 공간은 폐쇄적일 수 있는 지역 공동체의 망을 타자를 향해 열린 공공의 장소로 바꿔 준다.

나는 여기서 만난 독자들과 특별한 관계를 이어 가고 있다. ‘윤희와 동현’ 커플이 그들 중 하나다. 우공책방과의 인연으로 강화 이주 계획을 세운 그들은 최근 강화에 아예 땅까지 마련했다. 젊은이들을 보기가 힘든 지역으로선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중년에 접어든 뒤론 청년들과의 내밀한 유대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을 무렵 그들과의 만남은 내게도 새로운 감각과 사유를 벼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내 특강이 있을 때면 반차를 내고 섬을 찾는다. ‘윤희와 동현’처럼 수많은 시절인연들이 책을 매개로 우공책방의 교우록을 두툼하게 써내려 가고 있는 중이다.

우공책방에서 최근 우울한 이야기를 들었다. 지역서점을 지원하는 정부의 내년 예산이 전액 삭감되었다는 것이다. ‘우공’은 자신들의 살림보다 마을 사람들의 인문학 프로그램과 새들의 식빵 값이 더 걱정이다. 최근에 는 들고양이들의 먹이는 어떻게 하나. 근심을 나누는 내 이웃들이 불편을 감수하고 굳이 우공책방에 책 주문을 하는 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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