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눈길을 끄는 한국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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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위기 속 열린 영화 축제 BIFF
한국 영화 섹션 ‘비전’ 10편
정범·허장 감독 ‘한 채’ 눈길
‘집’으로 이야기 전개한 영화

영화 ‘한 채’ 포스터.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영화 ‘한 채’ 포스터.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긴 연휴가 끝나자마자 부산국제영화제(BIFF)가 열렸다. 영화제는 개최 직전까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영화제 소식에 귀 기울이며 실망과 기대감으로 10월을 기다리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도 영화제는 역시 영화로 말한다. 은퇴를 번복하고 돌아온 아키 카우리스마키, 여든이 넘은 고령에도 여전히 현역에서 뛰며 이름만으로 눈부신 켄 로치, 이탈리아 근현대사·정치·사회를 소재로 자신만의 해석을 내놓는 거장 마르코 벨로키오 감독까지 모두 주목받는 작품으로 돌아왔다. 영화제에서 이들의 영화를 볼 수 있는 건 삭막한 현실에서 발견한 오아시스다. 영화제가 개최되는 도시에 산다는 건 분명 매력적이다. 세계 각국의 영화들을 언제 또 이렇게 볼 수 있겠는가 말이다.

개인적인 일로 올해 BIFF에서는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섹션에 출품된 영화 10편을 관람했다. 뛰어난 작품성과 독창적 비전을 지닌 한국 독립영화 최신작을 선보이는 섹션이다. 한국 영화의 미래를 확인하는 장이라 놓칠 수 없는데 전반적으로 재미와 생각할 거리를 담고 있는 작품들이 골고루 배치됐다. 딸의 동성 연인과 함께 살게 된 엄마가 겪는 감정을 그리는 ‘딸에 대하여’, 농촌 마을에 살고 있는 청년 민우와 가족의 이야기를 한 편의 시(詩)처럼 아름답고 유려하게 풀어내는 ‘지난 여름’, 지방 중소기업 4년 차 대리가 정리해고 대상자 명단을 만드는 일에 투입되면서 발생하는 갈등을 무게 있게 다루는 ‘해야 할 일’ 등의 한국 영화는 현실을 깊게 살피면서도 묵직한 화두까지 던지고 있었다.


그중 정범, 허장 감독 영화 ‘한 채’도 눈길을 끌었다. 영화는 말없이 캐리어를 끄는 남녀가 어느 허름한 모텔로 들어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오프닝부터 궁금증이 일게 된다. 그들의 관계를 미처 파악하기 전, 방금 만난 여성이 지적 장애가 있다는 사실과 그들이 부녀 관계임을 알게 된다. 그러다 딸 ‘고은’과 아버지 ‘문호’가 이혼하고 딸을 키우는 ‘도경’을 만나면서 영화는 본격적으로 흘러간다.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기 위해 고은과 도경이 문서상으로 결혼을 하면서 그들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보면 도경과 문호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아픈 고은을 이용하는 고약한 사람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그렇게 단순한 방식을 차용하지 않는다.

문호는 욱하는 성질로 손해를 보는 타입이지만, 딸과 살기 위한 방법들을 강구한다. 처음엔 고은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과 태도를 보였던 문호는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닫혔던 마음을 열어간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의 감정이라기보다 자식에게 느끼는 감정 또는 연민처럼 보인다. 어느 때는 문호와 도경이 더 교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 채’는 무언가 설명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생략과 공백이 발생하지만, 그렇다고 영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도리어 이 생략과 공백은 영화의 리듬과 미학을 만들며 인물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닌지 걱정하게 만드는 영화적 긴장감을 발생시킨다.

아파트 청약으로 맺어진 그들의 관계는 쉽게 깨질 수 있다. 특히 청약에 걸려도 아파트의 분양가를 해결하지 못하는 그들이기에 아파트를 가진다는 건 꿈 같은 일이다. 그런데 문호와 고은은 집 없이 떠도는 상태고, 도경은 반지하 방이 있지만 배달기사와 대리기사 일로 밤낮을 쉬지 못하는 플랫폼 노동자로 집 밖을 떠도는 인물이다. 그들이 집을 가진다고 해도 집 안에서 쉴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사실 진정으로 필요한 건 집이 아니라 집 속에 살고 있는 가족처럼 보인다. 밥을 함께 먹고 걱정을 나누는 관계의 가족 말이다. 영화의 결말은 비극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서로를 염려하며 함께 있는 모습은 해피엔딩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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