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정의가 무능이 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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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극장가 휩쓴 '서울의 봄'
분노 부르는 역사가 흥행요인
악랄한 반란군·무능한 진압군 대조

우리는 1979년 12월 12일 군사 반란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언젠가는 12.12 사태로 불렸던 이 역사는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에야 ‘반란’으로 기록된다. 어떤 이에겐 혁명이었지만, 지금은 반역으로 기록되어 있는 이 역사는 누가 어떻게 기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임을 확인한다. 역사에는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 등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불법적으로 강제 연행하고 군권을 장악하면서 시작된 군사 반란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단 몇 줄로 요약된 역사 속 시간을 암기했지만 나와는 무관한 것으로 흘려보냈다. 그리고 그 시간이 다시 우리 앞으로 불려 왔다. 책에서 배운 내용보다 더 실감 나고 입체적으로 말이다.

‘비트’, ‘무사’, ‘아수라’ 등의 선이 굵은 영화를 연출한 김성수 감독의 신작 ‘서울의 봄’은 서울에서 일어난 신군부 세력의 반란을 막기 위한 일촉즉발의 9시간을 그린 영화다. 이미 영화를 본 관객들은 지나간 역사에 분노를 느끼고 또 누군가는 신랄하게 조소하였다. 그러니까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스펙터클도 정교한 기술력도 아닌 바로 우리의 ‘역사’였다. 역사 자체가 스포일러이기에 영화는 예상가능한 수순으로 흐른다. 그런데 ‘서울의 봄’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다루는 데도 분노가 들끓어 오른다. 관객들도 스트레스를 상승시키는 영화라고 입을 모은다. 그런데 분노 게이지를 상승시키는 이 영화가 모처럼 극장가에 활력을 불어놓고 있다.

영화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암살 사건 직후를 오프닝으로 잡는다. 전국에 계엄령이 내려지고 보안사령관 전두광(황정민 분)은 계엄법에 따라 수사 책임자인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되면서 권력욕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를 견제하려는 계엄사령관 정상호(이성민 분)는 책임과 사명감이 있는 군인 이태신(정우성 분)을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한다한다. 혼란을 틈타 권력을 잡은 전두광과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는 이유로 여러 번의 거절 끝에 보직을 맡은 이태신의 신념이 서로 대치되면서, 영화가 두 인물에 초점을 맞추어 흘러갈 것임을 예상케 한다.

그리고 반란의 주범 전두광에게는 막강한 사조직 ‘하나회’가 버티고 있다. 육사 출신으로 구성된 조직은 전두광이 반란을 모의하고 돌진하는 동력이 되어준다. 영화는 실제 있었던 역사를 전면에 배치하고 있지만 어떤 에피소드는 허구에 기대어 있기도 하다. 또한 누가 봐도 전두환과 노태우이지만 감독은 이들 인물을 역사라는 한정된 틀 속에 가두지 않기 위해 가명을 쓴다. 그런데 하나회는 실제 명칭을 그대로 사용한다. 하나회 구성원들의 반란 과정을 공들여 보여주는 이유도 조직의 실체를 파헤치겠다는 뜻이 담겨 있어 보인다.

더불어 영화는 진압군 이태신과 반란군 전두광의 대립각을 그리지만 선과 악이라는 단순구도로 배치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원칙과 신념, 권력욕이라는 대의명분으로 움직인다. 또 대부분의 영화에서 한쪽이 악랄하다면 다른 한쪽은 신념이나 정의로 가득 차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서울의 봄’은 하나회의 비열함을 그리면서도 동시에 대립각을 세우는 진압군을 나약하고 무능하기 짝이 없게 그린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자기 안위를 지키는 일뿐이다. 권력욕과 찌질함으로 똘똘 뭉친 이들 무리에서 이태신이라는 존재는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별을 몇 개씩 단 그들이 최후의 보루 육군본부를 버리는 순간, 관객은 반란군보다 진압군에 더 분노한다. 진압군의 결정은 서울을 지키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하던 이태신의 신념도 무너뜨린다. 결국 반란군을 제압하지 못한 이태신은 부하들에게 “대한민국에서 가장 무능한 지휘관 밑에서 고생하느라 수고 많았다”는 말을 남긴다. 유일한 정의가 무능이 되는 순간, 한국의 긴 겨울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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