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단상] 각자의 페이스

김동주 기자 nicedj@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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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주 독자여론부 차장

이삼일에 한 번, 어둠이 내려앉으면 집을 나선다. 귀마개와 마스크를 챙겨 쓰고, 귀에는 이어폰을 단단히 꽂고 러닝화를 신는다. 무릎 보호대는 심신의 안정을 위해 필수다.

올봄 ‘30분 달리기’에 도전했다. 체력 증진과 체중 감량, 두 마리 토끼 잡기가 목표였다. 본격적인 달리기는 처음이라 스마트폰 앱의 도움을 받았다. ‘쉬지 않고 30분 달리기’를 최종 목표로, 총 8주간 24회로 정해진 스케줄대로 훈련을 시작했다. 달리기와 걷기를 번갈아 반복하는 운동법은 달리는 시간이 점차 늘어났다. 1분 30초, 2분, 2분 30초, 3분, 4분, 5분으로 서서히 느나 싶더니, 6주 차부터는 7분, 10분, 12분, 15분, 20분, 25분, 30분으로 급격히 늘었다. 이게 가능할지 의심했지만 그들의 말처럼 과학적인 방법이었던지 마침내 한 번에 30분을 달리는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올여름 지독하게 쏟아진 폭우와 곧바로 이어진 폭염에 슬그머니 달리기를 놓아 버렸다. 몸은 편한 듯했지만 마음은 불편했던 여름을 지나면서, 달리는 시간대가 문제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사실 아침형 인간이 아니어서 새벽 30분 달리기는 기쁨이 아니라 고역이었다. 전날 밤부터 ‘내일 뛰어야 하네’ 한숨 쉬며 잠자리에 들고, 다음 날도 한숨 쉬며 일어나 뛰고, 일과시간엔 피곤을 느꼈던 것. ‘달리기에 가장 좋은 시간은 아침도 아니고 저녁도 아니고 뛸 수 있는 시간’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9월, 다시 ‘앱’을 켜면서 이번엔 뛰는 시간을 밤으로 바꿨다. 주 3회를 다 채우는 것은 새벽보다 힘들었지만, 뛰는 날은 즐거운 감정이 앞섰다. 달리기 미션을 끝내고 잠자리에 드니 하루의 마무리까지 행복했다. 일과 중 쌓인 잡념은 달리기에 약이 됐다. 뛰면서 잡념이 사라진다기보다는 잡념에 푹 빠져 달리면 시간이 훌쩍 지나갔기 때문.

날씨 핑계로 쉽게 무너지지 않을 방안을 찾다가 대회 출전을 떠올렸고, 이달 초 5km 건강 달리기에 참가했다. 짧은 거리였던 만큼 선수들보다는 나들이 나온 듯한 참가자가 더 많았다. 뛰다가 멈추고 뛰다가 멈추는 사람들 속에서 ‘내 페이스’를 유지하며 반환점에 다가선 순간 평정심이 깨졌다. 자신과 러닝메이트의 페이스에 맞춰 ‘하나 둘 셋 넷’ 크게 구령을 외치며 뛰어오던 사람 때문이었다. 나의 페이스보다 확연히 빠른 구령에 발걸음이 빨라지며 마음마저 허둥거렸다. 잠시 당황하다 속도를 더 늦춰 먼저 보내는 걸 택했다. 오버 페이스 강요에 내 영역을 침범당한 기분이 사라지기까진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최근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전국 만 19∼59세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꼰대 관련 인식 조사’ 결과를 보면, 꼰대인지 알아볼 수 있는 특징 1위로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조언이나 충고를 한다’가 꼽혔다. 나도 누군가에게 조언이나 충고를 가장해 오버 페이스를 강요하지는 않았는지 괜히 뜨끔해진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달리기를 할 때는 ‘개개의 기록도, 순위도, 겉모습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는가도, 모두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인생 레이스에서도 각자의 페이스를 존중해야 함을 달리며 깨닫는다.


김동주 기자 nicedj@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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