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시대유감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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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게 물든 입술,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 숱한 가식 속에, 오늘은 아우성을 들을 수 있어/ 왜 기다려 왔잖아, 모든 삶을 포기하는 소리를/ 이 세상이 모두 미쳐버릴 일이 벌어질 것 같네/ 부러져 버린 너의 그런 날개로, 너는 얼마나 날아갈 수 있다 생각하나/ 모두를 뒤집어 새로운 세상이 오길 바라네….’

서태지와 아이들의 1995년 노래 ‘시대유감’. 이를 듣노라면 터져 나오는 울분에 온몸의 털이 서는 듯하다. 청춘들은 왜 저렇게 절규하나. 내면의 방황과 세상에 대한 분노는 청춘의 특권이라지만, 그리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악이 사회성 짙은 내용을 곧잘 표출하곤 하지만, 저 노래는 그 이상으로 특별한 데가 있다. 음반 사전심의제 철폐의 직접적 계기가 된, 그러니까 한 시대를 상징하는 곡이기 때문이다.

저기서 ‘유감’이라는 표현은 한없는 절제 속에 있다. 사실은 분노, 좌절, 절망에 가깝다. 음악적 상상력을 옥죄는 사전심의는 1990년대 중반까지도 서슬 퍼렇게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공연윤리위원회(공륜)는 당시 가사가 과격하고 부정적 현실을 그렸다는 이유로 ‘시대유감’의 수정 작업을 지시한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보컬(가사) 부분을 덜어내고 연주곡만 담은 음반을 내는 방식으로 저항한다. 팬들도 공륜의 구시대적 잣대에 크게 반발하면서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자 정치권이 움직였다. 1995년 12월, 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음비법)의 개정. 조선총독부가 1933년부터 음악으로 조선인의 정서를 통제하려고 실시했던 음반 검열, 그걸 없애는 데 60여 년이 걸린 것이다.

하지만 ‘시대유감’ 사태 이전에 가수 정태춘의 지난했던 싸움을 먼저 기억해야 한다. 그는 1991년 음반 ‘아, 대한민국…’, 1993년 음반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내면서 사전심의를 거부했다. 정부로부터 고발당한 정태춘은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내는데, 그 결과가 바로 역사적인 1996년 6월 헌법재판소의 ‘가요 사전심의 위헌 결정’. ‘시대유감’이 한국 대중음악의 전환점이라면, 정태춘은 그 기틀을 마련한 행동과 실천의 음악가라 할 만하다. 한류의 시작이 1990년대 후반이라고 볼 때, 지금 전성기를 누리는 K팝은 여기에 크게 빚지고 있다.

아이돌 그룹 에스파가 ‘시대유감’을 리메이크해 그 음원을 15일 오후 6시에 공개한다고 한다. 1990년대 청춘의 저항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담은 이 노래가 MZ세대의 개성과 감각으로 재해석될 새로운 버전과 어떻게 만나게 될지 궁금하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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