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만남과 어긋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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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조희영 영화 ‘이어지는 땅’
청춘들 만남·헤어짐 그려내
일상 속 ‘인연의 끈’ 떠올려

영화 '이어지는 땅' 스틸컷. 필름다빈 제공 영화 '이어지는 땅' 스틸컷. 필름다빈 제공

만나다. 잊다, 잊히다. 버려지다, 버리다. 그립다. 어긋나다. 그가 지금 찾고 있는 건 무엇일까? 미련일까, 후회일까. 우리가 지금 만나는 건 절망일까, 희망일까. 잃고 난 후에야 비로소 찾아오는 상실감. 부재(不在)를 확인하고야 몰려오는 감정들. 여운들.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지박령처럼 한 자리에서 떠돌다가 그곳에서 길을 잃고만 사람들의 이야기 같다.

조희영 감독의 ‘이어지는 땅’은 낯선 땅에서 만나는 사람들, 무언가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런던과 밀라노를 배경으로 진행되는 영화는 이국적인 풍경을 통해 서정적인 면을 한층 부각시킨다. 먼저 런던에 살고 있는 ‘호림’은 길을 걷다 우연히 버려진 캠코더를 줍는다. 캠코더를 켜자 영상 속에서 한 여성이 나타난다. 행복해 보이는 여성을 지켜보던 호림은 캠코더를 끄고 다시 길을 걷는다. 호림은 공원 벤치에서 책을 읽고 있는 옛 연인 ‘동환’을 만난다. 한국도 아닌 런던에서 옛 연인과 우연히 재회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호림은 어제 만난 사이인 듯 아무렇지 않게 동환에게 말을 건다. 핸드폰을 잃어버렸다며 지인에게 문자를 보낼 수 있게 전화를 빌려 달라는 호림. 동환은 여자친구 ‘경서’를 기다리고 있다며 빨리 가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호림은 동환을 만나기 위해 런던까지 왔기에 목적을 달성하기 전까지 갈 수 없다. 망설이는 호림과 곤혹스러운 동환 앞에 경서가 나타난다. 자신을 동환의 후배라고 소개하는 호림에게 경서는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 제안한다. 호림, 동환과 경서는 그렇게 경서의 선배인 ‘이원’을 만난다.

이원. 그녀는 호림이 주운 캠코더 속에 있던 바로 그 여성이다. 이원의 집으로 향하는 세 사람은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관계를 지켜보는 건 아슬아슬하다. 호림은 결국 동환을 아직 사랑한다며 미련을 보이고 만다. 동환은 그런 호림을 단호하게 밀어낸다. 조금은 홀가분해 보이는 얼굴을 한 호림이 떠난다고 하자 이원이 배웅을 나선다. 함께 길을 걷던 호림은 버려진 캠코더 속에서 이원을 보았다고 전하고, 영화는 호림에서 이원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원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공간도 런던에서 밀라노로 이동한다.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 같지만 호림과 이원이라는 인물의 감정은 그대로 연결되고 있어 하나의 이야기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다. 영화는 이원이 집 근처에서 우연히 여행객 ‘화진’을 만나고, 그와 연인이 되는 과정을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섞어가며 풀어내고 있다. 사실 색다를 게 없는 내용이지만 영화의 연출은 이 지점부터 돋보이기 시작한다. 인물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를 걷고 또 걷는다. 도심의 주변부나 공원 혹은 어느 여행지를 끊임없이 걷다 길을 잃기도 한다.

걷는 영화답게 세트촬영보다는 야외씬이 많지만 이는 런던과 밀라노의 아름다운 도시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는 아니다. 장면 장면마다 마치 한 폭의 풍경화를 그대로 옮겨온 듯하지만, 이는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이국적인 듯 익숙한 풍경은 사소한 서사에 얽매이지 않게 만들며, 이미지 자체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알린다. 이때 영화는 낯선 공간에 거주하고 있는 인물들이 자연스럽게 그곳에 스며들어 감을 포착한다. 그리고 롱테이크와 롱숏으로 완성되는 풍경 속으로 인물들이 천천히 걸어들어올 때 영화의 매력은 한층 더 빛난다.

여유롭고 한가로운 모습으로 밀라노를 걷는 인물들은 그곳에서 길을 잃어 헤매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하며 누군가와 헤어지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는 누군가를 잃고, 잊어버리고, 그리워하는지 모르겠다. 어쩔 땐 무얼 잃었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흘러가다 우연히 이어지고 있음을 ‘이어지는 땅’을 통해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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