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단상] 병원에서 행복한 노인은 없다

최혜규 기자 iwil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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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규 플랫폼콘텐츠부 차장

영화 ‘플랜 75’에 병원은 딱 한 번 나온다. 혼자 살면서 호텔 청소일을 하는 78세 미치와 그의 단짝 동료가 후기 고령자 암 검진을 받는 장면이다. 동료는 “이제 이런 검사도 악착같이 살려는 것 같아 눈치가 보인다”고 말한다. 대기실 TV 속 플랜 75 홍보 영상에서는 “태어난 건 내 선택이 아니지만, 마지막은 내가 선택하겠다”며 환하게 웃는 여성 노인과 함께 “75세 이상에게는 무료입니다”라는 친절한 안내가 흘러나온다.

영화의 배경은 75세 이상 노인의 안락사를 국가가 조력하는 가상의 법안인 ‘플랜 75’가 시행된 지 3년이 된 일본이다. 플랜 75는 만 75세가 되면 건강 기록도, 가족 동의도, 주민 등록이 없이도 신청할 수 있다. 마음대로 원하는 곳에 쓰라며 준비금 10만 엔도 준다. 가족 사진 촬영을 포함한 호화 패키지 같은 민간 시장이 창출되고, 정부는 성공적인 고령화 정책이라 자평하며 65세로 대상 연령을 낮추는 것을 검토한다.

감독은 2016년 일본의 한 장애인시설에서 일어난 테러에 착안해 영화를 만들었다. 중증장애인 19명을 무차별 살해한 테러범은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은 죽어야 한다”는 편지를 남겼다. 이 대사는 영화의 첫 장면에 법안의 계기가 되는 노인혐오 범죄로 변주돼 등장한다.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의 기준은 뭘까. 미치는 건강하고 근로 의욕도 있지만 이 기준에서 밀려난다. ‘노인들이 일하는 게 불쌍하다’는 투서를 핑계로 호텔에서 해고되고, 취직은커녕 살 집을 구하는 것도 거절당하고, 생활고와 동료의 고독사 끝에 그는 결국 플랜 75를 선택한다.

일본 사회학자 우에노 지즈코의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에도 이 질문이 나온다. “사회에 도움이 안 되면 살면 안 되나요?” 저자는 안락사와 존엄사 논쟁에서 존엄한 삶의 경계는 무엇인지, 대체 가능한 선택지가 없을 때 자유로운 의사 결정이 성립할 수 있는지 묻는다. 그는 병원에서 행복한 노인은 없다고, 누구나 삶의 마지막은 간병 보험을 받으며 지역 사회에서 살다가 집에서 혼자 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대 정원 증원을 둘러싼 정부와 의료계의 줄다리기가 길어지고 있다. 증원의 핵심 근거는 고령화다. 2025년이면 65세 이상이 인구의 25%를 넘겨 의료 수요가 급증할 것이라는 것이다. 65세 이상 노인 인구의 진료비는 해마다 늘어 이미 전체 진료비의 43%를 넘겼다. 한편으로 학계에서는 노화를 역행할 수 있다는 최신 노화 연구가 성과를 내고 있다.

그러나 정작 가장 큰 의료 소비자인 노인은 한 덩어리의 숫자로 취급될 뿐 정책에서 소외된다. 볼썽사나운 드잡이 어디에서도 갈수록 길어질 노년기의 건강한 삶을 위한 통합 의료 서비스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그 속에서 건강보험과 병원의 역할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하는 세심한 논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노인은 의료 서비스의 푼돈 손님이나 쇼핑 중독자이기 앞서 질병과 죽음이 두려운 환자이고, 존엄을 지키면서 이웃과 함께 살고 싶은 시민이다. 의사의 노동 환경과 입시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환자의 복지와 국민의 건강을 위한 의료 개혁을 기대한다.


최혜규 기자 iwil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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