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점산은 사라졌으나 불사조처럼 기억 속에 살아 있다

최학림 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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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주에 원래는 7개 봉우리
해방 후 “3개? 4개?” 헷갈려
28년간 공사, 기억 착란 원인
낙동강에 더한 관심 가져야

김해국제공항 안에 겨우 1개로 남아있는 칠점산의 현재 모습. 부산역사문화대전 캡처 김해국제공항 안에 겨우 1개로 남아있는 칠점산의 현재 모습. 부산역사문화대전 캡처

소설가 요산 김정한(1908~1996)은 을숙도뿐만 아니라 낙동강 삼각주에 대한 관심도 컸다. 아니 삼랑진에서 을숙도에 이르는 낙동강 하류를 샅샅이 훑었다고 해야 한다. 그만큼 지역에 대한 그의 관심은 넓고 깊었다. 요산의 1970년 작품 ‘독메’ 배경과 관련해 주변의 부산 강서구 대저동 칠점산을 취재하면서 기록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낙동강 삼각주의 칠점산은 근현대사 시련의 산이자 신비의 산이다. 애초 그 산은 7개 섬이었다. 고려 말 정몽주의 노래도 있다. 밀려 내려온 토사가 퇴적되면서 조선 중기 이후 거대한 변화를 거쳐 일대는 평야로 변하고 섬은 산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 7개 봉우리는 간데없이 1개만, 그것도 일부분만 봉두난발 같은 모습(높이 35m)으로 겨우 남아있다. 인근에 비행장이 들어서면서 봉우리들을 깎아 활주로를 다졌는데, 섬이 산으로 변한 뒤 비행장 속으로 사라진 셈이다. 그 비행장이 오늘날 김해국제공항이 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칠점산 1개는, 7개 산 중에서 가장 컸던 ‘큰산’의 10분의 1도 채 안 되는 동쪽 한 모퉁이에 불과하다. 부산역사문화대전 캡처 현재 남아있는 칠점산 1개는, 7개 산 중에서 가장 컸던 ‘큰산’의 10분의 1도 채 안 되는 동쪽 한 모퉁이에 불과하다. 부산역사문화대전 캡처

▲봉우리, 3개인가 4개인가=봉우리들이 없어진 과정이 수수께끼처럼 신비롭다. 기록 미비가 한몫한다. 그 수수께끼 속에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시련, 경제개발의 고난 등 한국 근현대사가 깃들어 있다. 맨 먼저 일제강점기인 1942~1943년 비행장을 만들면서 칠점산 봉우리들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일제는 남북으로 점점이 놓인 칠점산 7개 봉우리 중 남쪽 봉우리들을 먼저 없앴다. 그런데 해방 후 남은 봉우리 수가 3개 혹은 4개로 오락가락한다. 현재 기록도, 주민들 증언도 그렇다.

그러나 일단 3개가 남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외국 사이트(VMF 323, K1)에서 확인되는 1951년 1월 사진에서 칠점산은 3개 봉우리로 남아있는 모습이다. 북쪽을 바라보고 찍은 그 사진에서 남북으로 뻗은 활주로 옆에 전투기 17기 정도가 있고, 드문드문한 건물과 막사들 뒤쪽 멀리 북쪽에 서로 근접한 제법 큰 산 2개(‘큰산’ ‘작은산’)가 보이고, 500m 이상 뚝 떨어진 남쪽에 흙을 쌓아놓은 듯한 작은 봉우리 1개(‘낮은산’)가 보인다. 동아대 한국학연구소가 낸 <칠점산과 초현대>(2013)의 ‘특별기고’와 그 원본인 강서문화원의 <강서문화> 제9호(2003)에 실린 ‘칠점산을 찾아서’(최해준)도 해방 후 3개 봉우리가 남았던 것으로 기록했다. 3개 산 각각의 이름도 ‘큰산’ ‘작은산’ ‘낮은산’으로 밝혀놨다.

위 사진 4장은 1952년 미공군기지로 사용하던 김해비행장 활주로 공사 때 칠점산 착평공사 모습이다. 깎여나가고 있는 산은 칠점산 중 가장 컸던 ‘큰산’이다. ‘큰산’은 칠점마을 바로 앞에 있었는데 마을과 ‘큰산’ 사이에 농토와 집들이 있었다는 주민들의 증언과 일치하는 모습이다. 4장 모두 같은 날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위 사진 4장은 1952년 미공군기지로 사용하던 김해비행장 활주로 공사 때 칠점산 착평공사 모습이다. 깎여나가고 있는 산은 칠점산 중 가장 컸던 ‘큰산’이다. ‘큰산’은 칠점마을 바로 앞에 있었는데 마을과 ‘큰산’ 사이에 농토와 집들이 있었다는 주민들의 증언과 일치하는 모습이다. 4장 모두 같은 날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28년간 서서히 깎이다=그런데 왜 3개와 4개를 오락가락할까. 그것은 칠점산 3개 봉우리가 한국전쟁 때부터 시작해 1978년까지 28년간에 걸쳐 서서히 깎여나갔기 때문이다. 현재 남은 사진(DBW FORGOTTENWAR 등)·기록과 주민들 증언을 종합할 때 칠점산 3개 봉우리는 ①한국전쟁 미공군기지(K1) 건설 때 ②1963년 전후 김해비행장 확장 때 ③1969~1970년 무렵 공군기지 확장 때 ④1970년대 중반 김해국제공항 건설 때 등의 단계를 거쳐 점차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그때그때 남은 봉우리 수의 기억에 따라 3개와 4개를 오락가락했다.

착오를 낳은 중요한 요인 하나가 칠점산 7개 산 중에서 가장 큰, 아예 ‘큰산’으로 불린 산이다. 현재 봉두난발 모습으로 남은 것은 이 ‘큰산’의 동쪽 작은 모퉁이, 10분의 1도 채 안 되는 일부분이다. ‘큰산’은 그 정도로 컸다. 문제의 이 ‘큰산’은 허무는 과정에서, 중간을 잘랐을 때 사람들 기억 속에 2개가 되는 조화를 부렸다. 실제 1970년대 한 사진에서 ‘큰산’은 당시 평강국민학교 뒤편에 상당히 허물어진 2개의 커다란 덩어리 모습인데 그것을 2개 봉우리로 기억하는 주민들이 많았다.

1970년대 초로 추정되는 칠점산 ‘큰산’ 일대 모습이다. 위쪽에 허물어지고 있는 두 덩어리의 모습이 ‘큰산’ 하나인데 이런 모습 때문에 이를 2개 산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생겼다. 지금 겨우 남은 칠점산은 두 덩어리 중 왼편의 일부분이다. ‘큰산’ 아래쪽에 지금은 이전해 가고 없는 평강국민학교 모습이 보이고, 사진 왼쪽 아래 민가 일대가 칠점마을이다. 칠점마을 앞 천(川) 건너편이 현재 군부대의 경계가 돼 있다. 부산역사문화대전 캡처 1970년대 초로 추정되는 칠점산 ‘큰산’ 일대 모습이다. 위쪽에 허물어지고 있는 두 덩어리의 모습이 ‘큰산’ 하나인데 이런 모습 때문에 이를 2개 산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생겼다. 지금 겨우 남은 칠점산은 두 덩어리 중 왼편의 일부분이다. ‘큰산’ 아래쪽에 지금은 이전해 가고 없는 평강국민학교 모습이 보이고, 사진 왼쪽 아래 민가 일대가 칠점마을이다. 칠점마을 앞 천(川) 건너편이 현재 군부대의 경계가 돼 있다. 부산역사문화대전 캡처
칠점마을 앞 다리 건너편 군부대 담장 아래 칠점산 기념비가 있다. 그 뒤 담장 너머로 한 모퉁이가 남아있는 칠점산 윗부분이 살짝 보인다. 최학림 기자 theos@ 칠점마을 앞 다리 건너편 군부대 담장 아래 칠점산 기념비가 있다. 그 뒤 담장 너머로 한 모퉁이가 남아있는 칠점산 윗부분이 살짝 보인다. 최학림 기자 theos@

또 다른 요인은 남쪽에 뚝 떨어진 ‘낮은산’이다. 이 산은 작은 데다가 1960년대 어느 빠른 시기에 없어져 기억하는 이들이 아주 적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10명 중 3명만이 이 낮은산을 기억했다.

이런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해방 후 칠점산은 한참 동안 ‘3개’(큰산, 작은산, 낮은산)였다. 그러다가 큰산이 두 쪽으로 났을 때 ‘4개’가 됐다. 하지만 없어진 남쪽의 낮은산을 아예 모르는 이들에게 칠점산은 또 3개였다(두 쪽 난 큰산과 그 옆의 작은산을 합쳐 3개). 이것이 칠점산 남은 봉우리가 3개와 4개로 오락가락하는 내막이다. 이를테면 칠점산은 오륙도처럼 3개와 4개의 기억을 오가며 스러진 것이다.

요산이 ‘독메’라는 작품에서 칠점산을 직접 들고나온 것은 아니다. 널따란 평야에 홀로 서 있는 작은 산이 독메인데, 칠점산과 같은 위도 상에 덕도산 오봉산 송산 등이 있고 이중 덕도산이 ‘요산의 독메’로 보인다. 하지만 여러 독메들이 토사를 붙잡아 거대한 낙동강 삼각주를 신비롭게 빚었다는 점에서는 같은 역할을 했다. 칠점산은 그중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독메의 무리였을 것이다.

부산은 바다 도시라고들 말하지만 또한 강의 도시이기도 하다. 요산은 그 점에 눈을 돌려 낙동강 삼각주와 그곳의 삶에 대한 관심을 강하게 환기했다. 현재 각종 개발로 뒤바뀌고 있는 삼각주…, 그 관심은 차라리 지금 더 필요하다. 요산의 독메는 기실 삼일운동의 상징이다. 그것은 보잘것없는 높이로 있으나 이윽고 수많은 토사들을 모이게 해 거대한 역사의 평야를 만들면서 대하가 도도한 역사처럼 굽이쳐 흐르게 한 근거라는 것이다. 칠점산이 한 모퉁이로 남았어도 사람들 기억 속에 불사조처럼 계속 살아남아 있는 이유가 그것이다.

동아대 한국학연구소가 2013년에 낸 <칠점산과 초현대>. 칠점산 한시와 자료 등이 들어 있다. 동아대 석당학술원 한국학연구소 제공 동아대 한국학연구소가 2013년에 낸 <칠점산과 초현대>. 칠점산 한시와 자료 등이 들어 있다. 동아대 석당학술원 한국학연구소 제공



최학림 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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