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한라산의 라면 국물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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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즐겨 먹은 라면이지만 산에 올라가서 먹는 맛은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가파른 산길을 숨을 헐떡거리며 오른 뒤 탁 트인 풍광을 마주한 채 젓가락에 면발을 둘둘 감아 입으로 불어가며 먹노라면 정말 세상 모두를 가진 것처럼 흐뭇한 미소가 저절로 온 얼굴에 번져나간다. 소설가 김훈은 그의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에서 “짙은 김 속에 얼굴을 들이밀고 뜨거운 국물을 마시면, 콱 쏘는 조미료의 기운이 목구멍을 따라가며 전율을 일으키고, 추위에 꼬인 창자가 녹는다”라고 묘사했다.

한 번 먹으면 인이 박이고 그 이후엔 강렬한 조건 반사를 동반하는 ‘그때’의 짜릿함을 잊지 못해 다시 라면을 챙겨 등산한다는 사람도 있다. 나트륨 등의 함량이 높아 건강에 좋지 않다는 얘기도 있지만 라면 맛에 포섭돼 이를 그리워 하는 몸의 기억을 억눌러 잠재우기는 쉽지 않다. 등산 등 야외 활동을 할 때는 그 열망의 강도가 더 세진다. 시쳇말로 과연 ‘라면의 민족’이라고 할 만하다. 근래 베트남에 1인당 라면 소비량 세계 1위를 내줬으나 여전히 연간 70개 이상을 먹는 사람들이 우리 국민이다.

이처럼 라면을 사랑하니 야외 취사가 가능한 전국의 공원 등 행락객이 몰리는 곳마다 라면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곳이 없다. 먹다 남긴 면발이나 국물의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특히 국물이 더 애물이라고 한다. 버려지는 국물 속에 함유된 나트륨 성분이 토양 속 미생물에 타격을 줘 자연 생태계에 해를 주기 때문이다. 최근 제주도 한라산국립공원관리소가 라면 국물 퇴치를 선언한 배경도 이런 연유다.

탐방객들 사이에 해발 1740m의 한라산 윗세오름에서 라면을 먹는 인증샷이 유행하면서 국물 처리가 난제로 떠오른 것. 윗세오름에 음식물 처리기 2대와 국물을 따로 버릴 수 있는 60L 통 5개를 비치했으나 넘쳐 나는 국물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고, 곤란해진 탐방객들은 국물을 땅에다 버리면서 토양과 수질 오염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공원관리소는 지난달 29일부터 탐방객을 상대로 ‘라면 국물 남기지 않기’ 캠페인을 시작했는데 라면 취식을 금지하지 않은 것은 그나마 탐방객들을 배려한 때문으로 보인다.

따라서 앞으로 한라산에서 맛보는 라면 국물은 무조건 다 먹어 치우는 게 좋을 것 같다. 굳이 캠페인이 아니더라도 한라산에서 라면 국물을 맛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긴다면 말이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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