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학수의 문화풍경] 인간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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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대 철학과 교수

노인들 안락사 신청하는 고령화사회
영화 ‘플랜 75’가 던지는 철학적 질문
사람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존재

“넘쳐나는 노인이 나라 재정을 압박하고 그 피해는 전부 청년이 받는다. 노인들도 더는 사회에 폐 끼치기 싫을 것이다.” 한 청년이 요양 시설에 들어가 여러 노인을 총으로 살해한 후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일본의 노령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애국적 결단임을 강조한다. 이것은 실제가 아니라 일본 영화 ‘플랜 75’의 처음에 나오는 사건이다.

인구 노령화를 겪는 사회에는 서로 다른 연령 집단 사이에 의견 불일치와 긴장이 일어난다. 인구가 노령화되면 될수록 공적, 사적 자원이 건강관리, 연금, 노인 서비스 분야로 더 많이 들어간다. 이런 자원 할당 때문에 청년 세대에게 직접 이득이 되는 교육, 직업 창출, 기술 개발 등에 투자가 줄어들어 젊은 사람들은 사회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분노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은퇴자의 수가 증가할수록 연금과 사회복지 시스템에 기여하는 청년 세대의 부담이 증가하는데, 젊은 사람들은 노령 인구를 부양하는 재정적 부담이 불만스럽다. 세대 갈등은 정치적 영역으로 확대된다. 노령 인구가 증가하면서 그들은 선거에서 점점 더 영향력을 확대하여 노령자에게 유익한 정책을 채택하도록 투표하는데, 그런 정책은 젊은 세대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세대 갈등을 포함한 노령 사회의 문제가 영화의 배경이다. 노령 인구의 증가가 일으키는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놀라운 프로그램을 발표한다. 영화 속 가상의 제도 ‘플랜 75’는 정부가 장려하고 시행하는 안락사 프로젝트이다. 75세가 넘는 노인이 ‘플랜 75’를 신청하면 그들이 국가와 사회의 부담을 줄이고 인간적 품위를 지키며 편안하게 죽을 수 있도록 국가가 도와주는 것이다.

70대 후반의 여성 ‘미치’는 호텔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있었는데 나이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해고되었다. 여러 군데에서 직업을 구해보았지만 어떤 곳도 그녀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미치는 자신이 이 사회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는 인간이라는 데 절망하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며 플랜 75를 신청한다.

이 영화는 노령 사회와 안락사에 대한 토론을 자극하며 인간의 가치에 대한 철학적 물음을 던진다. 인간은 왜 살 가치가 있는가? 여기에 대한 입장은 크게 두 개로 나뉘는데, 하나는 서양적 사고이며 다른 하나는 동양적 사고이다.

서양의 전통 철학적 시각에서 보면, 모든 사람은 내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나이가 많든 적든, 가난하든 부자이든, 사회에 기여를 하든 않든, 그런 것과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존재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 내재적 가치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 칸트는 자유라고 불렀다. 모든 사람은 사유하는 능력이나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자유의 능력을 갖추고 있는데, 이것은 오로지 인간만이 구비하고 있는 존엄한 역량이다. 유대교·기독교 전통에서 보면, 인간은 신의 형상을 본떠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신처럼 존귀한 존재이다. 근대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에 대한 사고의 변화가 일어난다. 경제적 성공이 개인의 가치를 평가하는 주요 척도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도 모든 인간은 내재적 가치를 지닌 존엄한 개체라는 인식은 흔들리지 않았다.

동양은 인간의 가치에 대해 서양의 개체주의적 관점과 달리 집단주의적 시각에서 접근한다. 가정·사회·국가와 개인 중 어느 쪽이 우선인가? 서양에서는 개인이 우위이다. 서양의 사회계약설에 따르면 국가는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조직된 실체이다. 반면 동양에서는 개인보다 집단이 우위이다. 개인은 가정이나 사회의 일원으로서 존재하지, 집단과 떨어진 고립적 실체가 아니다. 동아시아의 유가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는 가정이나 사회 내에서 개인의 역할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조선의 여자들은 아들을 낳지 못하면 가문의 존속을 위해 남편이 새로운 여자를 맞이하도록 허용했고, 일본의 가미카제 특공대는 태평양 전쟁에서 연합군 함대에 비행기 자폭 테러를 감행했다.

플랜 75의 기저에는 인간의 가치에 대한 집단주의적 관점이 깔려 있다. 정부와 청년 세대들은 노인들이 더 이상 국가에 아무런 쓸모가 없으니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귀찮게 여긴다. 안락사를 신청한 노인들 역시 이런 입장을 받아들이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에 사상적 반전이 일어난다. 안락사 장비의 고장으로 미치는 죽지 않았다. 마을로 돌아온 미치는 석양 무렵 도로의 철제 난간을 잡고 마을을 내려다보며 노래를 흥얼거린다. ‘사과나무 아래에서 내일 다시 만나요. 황혼에 물든 붉은 석양 서쪽으로 질 무렵에….’ 내일까지 살면 다시 내일이 있다. 죽음을 경험한 후 미치는 인간 존재는 그 자체 가치가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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