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푸른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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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1966~ )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2004) 중에서

사랑은 장력(張力)이다. 두 존재가 우연히 부딪쳐 서로 끌리는 마음을 갖게 되면서 사랑의 파장은 시작된다. 그런데 사랑의 존재들은 각자 ‘하나의 별’로 탄생된 것과 같아 제 안의 인연과 운명으로 인해 중력을 지닌다. 두 중력이 서로 밀고 당기게 될 때, 사랑은 필연적으로 직선이 아니라 곡선, 즉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을 밟을 수밖에 없게 만든다.

직진으로 가닿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두레박을 드리우’지만 중력은 그리움마저 휘게 하여 ‘수만 갈래의 길’을 퍼뜨릴 뿐이다. 사랑의 고통으로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어도 사랑의 장력으로 운명의 지침은 ‘네게로 향해’ 있다. 그 고통과 열락의 시간들은 모두 너에게 가는 길, 사랑의 인력이 이끄는 ‘에움길’이 실은 가장 빠른 ‘지름길’임을 알게 하는 단련의 순간들이다.

김경복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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