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공손함과 자유분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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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석 문화평론가
교육 수혜자서 교육 소비자로
자유 강조하며 공손함 강요는
모순적 태도 아닌지 생각해야

외신을 보다가 외국에서 태권도가 인기라는 기사를 접할 수 있었다. 태권도야 오래전부터 늘 일정한 인기를 유지했던 스포츠이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기사였다. 하지만 기사의 뉘앙스가 예전과 달랐다. 해당 기사는 태권도가 인기를 모으는 이유가 아이들의 태도 변화 때문이라고 일러주고 있었다. 아이들의 변화를 다름 아닌 부모들이 선호한다는 뉘앙스도 함께 풍기고 있었다.

지금까지 서구인들은 자유분방함을 양보할 수 없는 개성으로 여겨왔다. 그들은 개개인의 차이와 권리를 강조하고 집단과 연장자에 대한 공경심을 한쪽으로 미루어두는 성향이 강했다. 그런데 기사 속 부모들은 아이들이 지나치게 자유분방하게 자라는 것을 꺼리는 기색이었다. 동시에 자기중심적으로 길러질 아이에게 예절과 공경을 가르치는 태권도를 환영했고, 그러한 훈육에 기반한 한국식 교육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한국의 교육은 이와는 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요즘 학생들은 ‘교육 소비자’로 지칭된다. 그들은 언제든 자신들이 원하는 교육 서비스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불만이 있으면 언제든 항의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조금이라도 손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면 그 책임을 교사 탓으로 돌리고 있으며, 부모 역시 귀한 자식이 피해를 당한 일에 매우 과하고 점점 격하게 대응해도 좋다고 믿고 있다.

그러던 중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건이 일어났다. 아시안컵 축구 대표팀에서 벌어졌다는 이른바 ‘하극상 사건’으로 인해 전도유망한 어린 축구 선수는 매장당하다시피 했고, 지금도 비난의 화살을 좀처럼 피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한때 해당 선수는 전 국민의 성원을 한 몸에 받아오던 인기 선수였지만, 선배와 고참 그리고 주장에게 대들고 권위에 복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리고 그 행실이 집단과 팀의 결속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엄청난 근신을 강요받고 있다.

하지만 현재 교육 풍토를 감안하면, 이 사건은 의외의 사건일 수밖에 없다. 자식들이 교육 현장에서 교사의 권위를 누르고 교육 소비자로 올라가기를 바라왔던 학부모의 그간 의지를 감안한다면, 그렇게 자유분방하게 성장한 선수가 선배와 집단과 장유유서의 질서를 어기는 일은 극히 당연한 일일 뿐만 아니라 권장해야 할 사안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선생님을 탓하고 조그만 피해조차 경원시하던 학생이 자라서 축구 경기를 한다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고참과 선배의 지시를 참아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우리는 자기 자식에게는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고 자신을 주장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면서도, 막상 그러한 어른이 되면 눈에 거스른다고 내치는 볼썽사나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권위에 복종하는 일과 부당함에 항의하는 일은 다를 수 있으니, 교사에게 대들고 훈육을 거부하는 일이 어떤 경우에는 정당함을 되찾는 일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자율적으로 생각하고 동등하게 행동하라는 교훈이, 선배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 의사대로 하는 행동과 어쩌면 근본적으로 다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차이를 감안해도, 우리가 나의 자식에게는 권위에 저항하고 평등한 관계를 주지시키면서도 남의 자식에게는 집단의 질서를 따르고 리더를 섬기라고 강요해 왔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외국 학부모 사연으로 돌아가자. 그들은 아이들의 자유에 뒤따르는 방종을 경계하고자 하고 있었다. 자유와 일탈은 종이 한 장 차이이고, 권위에 대한 무시는 자기 과오로 이어질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아이를 가르쳐야 할까. 학교에서 만나는 교사의 말은 즐겨 무시하되, 국가대표가 되어 만나는 선배 말은 무작정 따르라고 가르쳐야 할까. 어떻게 생각하는가. 두 가지 서로 다른 길이 과연 하나의 가르침으로 모아질 수 있다고 보는가. 혹여, 그 사이에서 우리가 너무도 편리하게, 자기모순을 숨겨 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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