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얼굴을 한 가짜 음란물… 그러나 고통은 진짜였다 [딥페이크 성범죄 급증]

송지연 기자 sj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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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걸려 온 전화 한 통
“당신이 나오는 영상을 봤어요”
세상이 무너지는 패닉에도
처벌도 삭제도 어렵다고만…
사생활 정보도 공개해 놓아
수없이 걸려오는 낯선 전화들
공포가 되어버린 세상…
일상 회복, 가능하긴 한 걸까

13일 오후 이젠센터(부산광역시 여성폭력방지종합지원센터)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 직원이 성범죄물 유포 현황을 살펴보고 있다. 이재찬 기자 chan@ 13일 오후 이젠센터(부산광역시 여성폭력방지종합지원센터)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 직원이 성범죄물 유포 현황을 살펴보고 있다. 이재찬 기자 chan@

딥페이크 성범죄 피해자는 합성 이미지를 눈으로 목격하는 순간 극심한 성적 수치심과 공포를 경험한다. 딥페이크로 만들어낸 이미지는 ‘가짜’이지만 피해자들은 일상이 흔들리는 생생한 고통을 겪는다. 이젠센터(부산광역시 여성폭력방지종합지원센터)의 상담 사례를 바탕으로 피해 단계별 특징을 살펴봤다.

■제보-누군가의 연락

“혹시 A 씨 맞나요? 텔레그램에서 A 씨 사진과 동영상을 봤어요.”

지난달 대학생 A 씨는 모르는 이로부터 충격적인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처음에는 장난이나 신종 보이스피싱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어진 발신자의 이야기는 구체적이었다. 발신자는 자신이 속한 텔레그램 단체방에 A 씨의 음란물과 연락처가 게시되어 있어 연락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딥페이크 성범죄 피해자는 누군가의 연락을 받고 피해 사실을 인지한다. A 씨처럼 성범죄물에 자신의 전화번호가 노출되어 연락이 오기도 한다.

현장 상담원들은 처음으로 허위 이미지의 존재를 알린 이가 대개 가해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피해자에게 정신적 충격을 주기 위해 제보를 가장해 음란물의 존재를 알린다는 것이다.

피해자는 범죄 발생, 즉 딥페이크가 시작되는 순간이 아니라 사후에 범죄를 알기 때문에 이미 성범죄물이 유포됐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떨어야 한다.

단순히 알리는 차원을 넘어 협박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들은 피해자와의 평소 관계를 이용하거나 해킹 등을 통해 지인들의 연락처를 확보한다. 가해자들은 주로 직장이나 학교 등 피해자와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는 다수에게 퍼뜨리겠다고 협박한다.

■패닉-성적 수치심과 공포

딥페이크 성범죄 피해자가 사건 발생 이후 가장 충격을 받는 순간은 자신이 등장하는 딥페이크 성범죄물을 접했을 때이다. 최근 들어 기술의 발달로 사진 한 두 장으로 ‘진짜 같은 가짜’가 만들어지면서 피해자들의 고통은 더욱 커졌다.

딥페이크 성범죄 피해자 B 씨도 그중 한 명이다. B 씨는 인스타그램 등 SNS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다. 온라인상에 자신의 사진을 올린 것은 카카오톡 프로필이 유일하다. B 씨는 고작 몇 장의 프로필 사진으로 정교한 진짜 같은 동영상이 만들어진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동영상에는 머리카락 등의 움직임까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심지어 피해자 특유의 목소리 톤까지 입혀져 있었다.

이젠센터 한 상담원은 “작년까지만 해도 자세히 보면 합성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수준이 많았지만, 올해 들어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 힘든 것들이 많다”며 “사실성이 높아지면서 피해자들의 정신적 충격도 크다”고 말했다.

딥페이크 성범죄물에 등장하는 문구나 개인정보도 피해자들이 충격을 받는 대목이다. 직장이나 아르바이트 장소, 대학 이름 등 실제 자신이 활동하는 사회적 공간을 적시한 성범죄물이 다수다. 피해자들이 정상적인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 성범죄물에 성매매 여성이 홍보에 나선 듯한 선정적인 문구가 등장하기도 한다. 남성들의 연락을 기다린다는 내용과 함께 전화번호가 표시되어 있다. 실제 이를 본 이들이 피해자에게 전화를 걸어 추가 피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이런 전화를 받은 피해자들은 끊임없이 성범죄를 당할 수 있다는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수사-강력 처벌 원하지만

피해자들은 딥페이크 성범죄 피해 사실을 인지한 후 경찰이나 전문 기관에 사후 처리를 의뢰한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가해자를 붙잡는 데에는 더 높은 수준의 수사 기술이 필요한 상황이다. 음란물이 해외 SNS나 사이트를 이용할 경우 범죄 관련 협조를 받는데 6개월 이상 걸리는 것이 보통이다. 이마저도 회신이 오면 다행인 실정이다.

가해자를 단시간에 특정하기 어렵다는 점을 악용해 악랄하게 협박을 하기도 한다. 최근 부산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피해자와 가까운 친구의 SNS 아이디를 도용한 협박 사건이 발생했다. 가해자는 도용한 아이디로 피해자의 딥페이크 영상을 학교 친구들에게 뿌리겠다는 협박을 수시로 했다. 심지어 경찰에 신고한 이후에도 ‘신고한 사실을 알고 있다’며 ‘신고해도 나를 잡지 못할 것’이라며 지속적으로 협박을 했다. 피해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있는 가해자의 메시지에 피해 학생뿐만 아니라 학부모까지 극심한 불안에 떨어야 했다.

드물긴 하지만 피해자가 직접 가해자를 밝혀내기도 한다. 앞선 사례의 대학생 A 씨는 스스로 가해자를 찾아냈다. 텔레그램 단체방에 있던 이 중에 조력자를 자처한 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A 씨는 조력자를 통해 텔레그램 단체방에 공유된 자신의 일상 사진과 영상 통화 동영상을 확보했다. 가해자가 A 씨와 친분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딥페이크 전 사진과 동영상을 텔레그램 방에 공유한 것. 사진 중에는 몇 명의 지인에게만 공개된 인스타그램에 올린 것이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가해자를 특정했다.

■후유증-일상을 흔드는 고통

딥페이크 성범죄 피해자는 불법 촬영물 피해자와 유사한 정신적 어려움을 호소한다. 불특정 다수가 자신의 사진이나 영상을 봤을 것이라는 공포 속에 일상생활이 힘든 경험을 한다.

대표적으로 호소하는 어려움은 지하철 등 대중교통 이용이다. 핸드폰을 보던 이와 눈을 마주치면 해당 영상을 본 후 자신을 쳐다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직장인의 경우 동료와 눈을 맞추는 것을 힘들어해 퇴사를 하기도 하고, 구직자는 면접 보기가 힘들다고 호소하는 이도 있다. 지인이 가해자일 경우 극심한 분노로 우울증이나 타인에 대한 불신이 높아져 대인기피증을 겪기도 한다.

딥페이크 성범죄 피해자는 완벽한 삭제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때 다시 한번 큰 정신적 충격을 받는다.

이젠센터를 비롯해 전국의 디지털 성범죄 대응 기관은 삭제를 지원할 뿐 삭제 권한은 없다. 이들 기관은 대부분 성범죄물 유포를 확인해 플랫폼에 삭제 요청을 하거나 방송통신위원회에 차단 요청을 하고 있다.

해외에 서버를 둔 사이트의 경우 차단이 현실적으로 어렵다. 설사 차단했다고 하더라도 누군가 이미 저장했다면 언제 다시 유포될지 모른다. 이젠센터 정경숙 센터장은 “디지털 성범죄는 온라인상에서 복제와 유포를 통해 ‘끝나지 않는 피해’가 발생한다는 데에 심각성이 크다. 특히 딥페이크 성범죄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느끼는 폭력의 강도가 큰 차이를 보인다”며 “앞으로 더욱 증가할 딥페이크 성범죄를 우리 사회가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인식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송지연 기자 sj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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