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트로이 목마… “이스라엘이 제조”
레바논 삐삐·워키토키 폭발
호출기 이어 무전기 동시 폭발
레바논 보건부 “사망자 20명”
제조 때 폭발물 삽입 주장 제기
전면전 우려 목소리 더욱 커져
레바논 전역에서 레바논 무장 정파 헤즈볼라의 주요 통신수단인 무선 호출기(삐삐)가 동시 다발적으로 폭발한 데 이어 다음날인 18일(현지시간)에는 휴대용 무전기(워키토키)까지 폭발했다. 이로 인해 사상자는 3100명 이상으로 늘어난 것으로 전해졌다. 폭발의 배후로 지목된 이스라엘이 사건 개입 가능성을 시사하는 발언이 이어지면서 전면전 우려가 더욱 커지고 있다.
이날 외신에 따르면 이날 레바논 동부 베카밸리와 수도 베이루트 외곽 등지에서 헤즈볼라가 사용하는 워키토키가 연쇄 폭발하면서 20명이 숨지고 450명 이상 다쳤다고 레바논 보건부가 밝혔다. 이는 당초 발표된 14명에서 사망자 수가 6명 늘어난 것이다.
앞서 전날(17일)에는 베이루트 남쪽 교외, 이스라엘 접경지인 남부, 동부 베카벨리 등 헤즈볼라 거점을 중심으로 삐삐 수천 대가 동시다발 터졌다. 이로 인해 어린이 2명을 포함해 12명이 숨지고 3000명 가까이 다쳤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사진·영상 분석을 토대로 이날 무전기 폭발의 위력이 전날 삐삐 폭발보다 더 강했을 수 있다고 추정했다. NYT는 무전기가 삐삐보다 더 크고 무거우며 이날 폭발은 전날보다 더 큰 화재로 이어졌다며 이는 “더 많은 폭발물이 탑재됐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짚었다.
서방 매체들은 이스라엘을 이번 폭발 사건의 배후로 지목했다. 로이터에 따르면 익명을 요구한 레바논 안보 소식통은 헤즈볼라가 수입한 삐삐 5000개에 이스라엘 대외 정보기관 모사드가 폭발물을 심었다고 주장했다. 미국 CNN 방송은 17일 삐삐 폭발이 모사드와 이스라엘군의 합동 작전의 결과라는 것을 파악했다고 전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번 폭발은 적을 교란하기 위한 이스라엘의 가장 야심 찬 비밀 작전 중 하나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특히 이미 수년 전부터 유럽에 페이퍼 컴퍼니(유령회사)를 차려놓고 기회를 엿보다가 제조단계에서부터 폭발물과 기폭장치가 삽입된 ‘특수제품’ 수천 개를 헤즈볼라에 팔아치우는 데 성공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NYT는 이번 사건에 대한 브리핑을 받은 전현직 국방·정보 당국자 12명을 취재한 결과 이번 폭발은 이스라엘 정보기관이 오랫동안 준비해 온 작전이었던 것으로 파악됐다고 보도했다.
폭발한 무선호출기의 잔해에는 대만 업체 골드아폴로의 스티커가 부착돼 있었다. 이에 전문가들 사이에선 이 회사가 생산한 무선호출기가 헤즈볼라에 전달되는 과정에서 누군가 폭발물과 기폭장치를 심었을 것이란 추측이 나왔다.
골드아폴로의 창립자인 쉬칭광 회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해당 기기를 제조한 건 헝가리 업체인 ‘BAC 컨설팅’이라면서 골드아폴로는 라이선스 계약을 통해 자사 상표 사용을 허락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대만 외교부도 해당 무선호출기가 대만에서 만들어진 제품이 아니라고 밝혔다고 자유시보 등 대만 언론이 19일 보도했다. BAC 컨설팅 역시 문제의 무선호출기를 만들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가운데 요아브 갈란트 이스라엘 국방부 장관은 전날 북부에 있는 라맛 다비드 공군기지를 방문해 전쟁의 새로운 단계가 시작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공군 장병들에게 “중력의 중심이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우리는 병력과 자원, 에너지를 북쪽으로 돌리고 있다”며 “나는 우리가 새로운 전쟁 단계의 시작점에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적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두고 갈란트 장관이 언급한 ‘새로운 전쟁 단계’는 무선 호출기·휴대용 무전기 폭발 개입을 시사한 것이란 외신의 관측이 쏟아졌다. CNN 방송은 갈란트 장관의 발언을 소개하면서 “이 발언은 중동을 다시 확전 위기의 가장자리로 몰아넣은 이번 작전에서 이스라엘의 역할을 암묵적으로 시인한 것”이라고 논평했다.
특히 호출기와 무전기 연쇄 폭발은 이스라엘이 최근 북부지역 피란민의 고향 복귀를 새로운 전쟁 목표로 추가하고, 가자지구 전쟁에 주력부대로 활용했던 98사단을 북부 레바논 국경지대로 이동 배치한 가운데 이뤄져 관심을 모았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북부 전선으로 전쟁의 무게추를 옮기면서 그동안 미뤄왔던 헤즈볼라와 전면전을 실행할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헤르지 할레비 이스라엘군 참모총장은 이날 북부사령부를 방문해 “북부 국경 지역 주민들이 고도의 안전을 보장받는 상황에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안보 상황 조성을 결심했다”며 “이를 위해 우리는 필요한 모든 일을 할 준비가 됐다”고 말했다.
이은철 기자 euncheol@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