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귀중한 사료를…” 10년 넘게 방치한 통영시·문화유산청
2014년 국도변 텃밭서 24기 발굴
사학계 “통제영 연구에 매우 중요”
임시 가림막 두른 채 외부에 방치
비바람에 훼손 심각, 시는 뒷짐만
경남 통영의 한 텃밭에서 무더기로 출토된 ‘조선시대 삼도수군통제사 사적비’(부산일보 2014년 10월 16일 자 10면 보도 등)가 당국의 무관심 탓에 소실될 위기에 처했다. 사적비는 통제사 개인 행적과 연보가 상세히 기록된 유일한 흔적이다. 당시만 해도 베일에 싸인 통제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이대로는 빛도 못 본 채 다시 사장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23일 통영시와 향토사학계에 따르면 2014년 10월 무전동 783번지 일원(14번 국도 옆 비탈 배추밭)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사적비 24기가 발굴됐다. 비석은 길이 1.5m, 너비 60cm, 두께 30cm 크기로 비문을 통해 통제영 지휘관이던 통제사의 공덕을 기리는 사적비로 확인됐다. 특히 지금까지 확인된 비슷한 매장문화재 발굴 사례 중 가장 큰 규모라 국내 역사학계의 관심이 집중됐다.
당시 매장문화재 수습조사를 진행한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 산하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비석을 통해 통제영의 군사제도와 실제 운영, 재정 실태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 가치가 매우 높다”고 평가했다. 전문위원들은 또 비석 세부 연구와 함께 또 다른 비석이 주변에 묻혀있을 가능성이 크다며 주변 지역에 대한 추가 발굴을 주요 과제로 제시했다.
실제 사적비의 주인공은 모두 ‘전의 이씨(全義 李氏)’ 집안 출신이다. 하지만 족보에 기록된 이지원, 이방수 통제사비를 비롯해 비석의 이수(비갓), 좌대 그리고 ‘매치비’(먼저 묻은 비석을 기록한 조형물)에 남은 일부 비석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발굴지점은 조선 시대 한양과 통영을 오가는 대로인 ‘통영로(통영별로)’였다. 지금은 텃밭으로 사용되는 외진 곳이지만 과거 역대 통제사들이 부임과 퇴임 때 지나던 길이라는 의미에서 '통제사길'이라 칭해지기도 했다. 통영시의회는 추가 발굴과 조사·연구를 통해 통제사 연구와 통제사 길 활성화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이후 통영시와 국가유산청이 뒷짐만 지면서 10년 넘게 방치되고 있다. 무엇보다 발굴된 비석 관리 실태가 심각하다. 매장문화재는 발굴 후 풍화와 산화 작용이 뒤따르는데, 지금까지 통제영 복원지 한쪽 야외에 임시 가림막만 두른 채 덩그러니 놓였다. 이 때문에 일부 비석은 깨지고 갈라졌다. 음각으로 새긴 글귀가 부서지거나 탈락한 것도 부지기수다.
이상훈 전 육군박물관 부관장은 “돌도 삭는다. 오랫동안 땅속에 묻혔던 것들은 더 취약하다”며 “관광객 부주의나 고의로 인한 훼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만큼 하루라도 빨리 전문가 진단을 받고 보존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짚었다.
추가 조사 역시 답보상태다. 통영시는 발굴 이듬해 국가유산청에 ‘긴급 조사 지원’을 요청했다. 최초 발굴지 주변 330㎡에 대한 조사 예산 1억 7890만 원을 지원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국가유산청은 “긴급하지 않다”며 “필요시 통영시 재정으로 하라”고 회신했다. 이후 세관의 관심 수그러들면서 통영시도 덩달아 손을 놨다.
그사이 발굴지 주변 훼손은 가속화하고 있다. 경사가 심한 비탈이라 토사와 잡풀이 뒤엉켜 현장을 찾는 것도 쉽지 않다. 주변엔 상가와 다가구 주택이 우후죽순 들어섰고 일부 빈 땅은 인근 주민들이 텃밭으로 개간해 각종 농작물을 심었다.
순청향대학교 제장명 이순신연구소장은 “통제사 비석 연구는 통제영의 막강한 군사, 엄청난 재정을 밝힐 수 있는 매우 귀중한 기회”라며 “유물의 사료적 가치를 평가하고 통제사 연구의 밑거름으로 활용하기 위한 대책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김민진 기자 mjkim@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