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내 안의 진짜 고통과 마주하기
영화평론가
제시 아이젠버그 '리얼 페인'
서로 다른 두 사촌의 여행에서
진정한 공감·애도 생각하게 해
언젠가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 간 적이 있다. 누군가의 희생에 슬퍼했고 비극 속에 사라진 누군가를 추모했다. ‘리얼 페인’을 보며 비극을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내가 ‘진짜 고통’을 느꼈었던 건지 의심이 들었다. 그러니까 당시를 살지 않았던 내가 사진 몇 장과 교과서에 적힌 지식만으로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제시 아이젠버그 감독의 ‘리얼 페인’은 역사적인 비극과 개인의 고통을 나란히 세우며 진짜 고통이란 무엇인지 묻는다.
생김새부터 성격, 취향까지 모든 것이 다른 사촌 ‘데이비드’(제시 아이젠버그)와 ‘벤지’(키에란 컬킨)가 오랜만에 만난다. 그들의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할머니의 고향 폴란드로 여행을 가라며 돈을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할머니는 죽을 고비를 넘기며 미국으로 건너온 생존자이자 이민자였다. 손주들이 뿌리를 잊지 말라는 숨은 뜻일까. 사촌은 할머니의 유언대로 폴란드로 떠난다. 최종 목적지는 할머니가 살았던 집에 가는 것이지만 그들은 먼저 ‘홀로코스트 투어’를 하기로 결정한다.
데이비드는 벤지와의 여행이 어색할 것이라 생각한다. 한때는 형제처럼 친밀한 사이였지만 데이비드가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서 벤지와 멀어졌기 때문이다. 아마도 두 사람은 할머니의 유언이 아니었다면 마주칠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데이비드는 여행 전부터 초조해 보인다. 가족과 떨어지는 것도 불안한데 약속장소인 공항으로 가는 길까지 막힌다. 게다가 벤지에게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답이 없다. 급하게 공항에 도착한 데이비드는 몇 시간 전부터 도착해 공항에서 놀고 있었다는 벤지를 보며 어처구니없으면서도 한편으론 안심한다. 벤지는 과거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는 홀로코스트 투어를 중심으로 진행되기에 다소 무겁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리얼 페인’은 지금까지 보았던 홀로코스트 영화와 결이 다르다. 이 영화는 어떻게 하면 비극을 더 참혹하게 보여줄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각자가 어떤 방식으로 비극을 받아들이고 애도할 수 있는지 살핀다. 이는 거침없이 행동하고 말하는 벤지 덕분에 가능하다. 독일군에 맞서 싸운 민중의 동상 앞에서 우리는 조용히 사진을 찍는 것을 의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벤지는 정답이란 없다는 듯 투어의 일원들이 민중이나 독일군이 되어보는 체험을 하게끔 권하고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다.
사실 어떤 문제든 감정적으로 대하는 벤지를 보는 건 불안하다. 유대인 수용소가 있는 도시로 가는 기차에서는 “80년 전 유대인들은 꼬리 칸에 가축처럼 실렸을 것”이라며 일등석 자리를 박차고 끝 칸으로 이동한다. 벤지는 짧은 시간이나마 그들의 고통을 온전히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그는 홀로코스트 투어가 진정한 애도와 공감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데이비드는 그런 벤지가 어디로 튈지 몰라 좌불안석이다. 그러고 보면 데이비드는 ‘우리’와 닮았다. 적당히 자신을 감추고 관계에서도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비극에 관심을 가지지만 그것이 나의 삶과는 연결되지 않는다고 여긴다.
‘리얼 페인’은 불안정한 벤지의 감정을 통해 영화 주제로 나아간다. 벤지는 정보만 나열하는 가이드에게 과거의 공동체와 현재의 우리가 연결되는 투어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당황한 가이드는 유대 전통에 따라 묘비석 위에 돌을 올리는 행위로 이름 모를 누군가를 추모하자고 제안한다. 과거의 기억이 현재를 잠식할 수 없으나 어떤 방식으로든 이어질 수 있다. 홀로코스트를 경유해, 할머니의 집으로, 데이비드와 벤지의 내밀한 이야기로 말이다. 그로 인해 영화는 내 안의 ‘진짜 고통’과 직시할 때 공동체의 고통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