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칼럼] 우리만의 애순이를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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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은 공모 칼럼니스트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주제는 '사랑'
인물들 역경·고난 속에서도 놓지 않아
누군가의 손길 덕분에 삶 지탱하게 돼

부모의 사랑은 자기희생에서 출발
자식 향한 '짝사랑'으로 표현해 감동
사랑의 결실 모여 지금의 내가 존재

나의 친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치매를 앓기 시작하셨다. 원래도 친구가 별로 없으셨는데, 할아버지가 떠난 이후에는 더 외로우셨을 것이다. 나는 그 외로움이 치매를 부른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하곤 했다. 물론 할머니가 이 생각을 알게 되면 못마땅해하시며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점점 더 어린아이가 되어가는 듯한 할머니의 모습을 지켜보며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돌봄 시설에 계신 할머니를 조금씩 잊어가던 나였지만, 어느 날 할머니 생각이 유난히 간절하게 났다. 이유는 다름 아니라 최근 전 국민을 울리고 있는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때문이었다.

주변에 안 본 사람을 찾기 힘들 만큼 인기를 끌고 있는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에서 태어난 애순이와 팔불출 관식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사계절의 흐름 속에 담아낸 16부작 드라마다. 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단연 ‘사랑’이다. 인물들은 숱한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결국 사랑만큼은 놓지 않고, 어떻게든 그것 하나만은 붙잡는다.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린 이유는, 우리 역시 이 사랑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에서 포기하고 싶은 수많은 순간 속에서, 누군가의 보살피는 손길 덕분에 우리가 여기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할머니는 같이 놀 친구도 없어?”하고 묻던 내 어린 시절의 모습은 극 중 애순의 딸 금명이와 닮았다. 나는 요즘도 종종 부모님께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엄마 아빠는 취미 없어?” “수다 떨거나 맛집 갈 친구 없어?” 진짜 몰라서 묻는 건 아니다. 나는 그들이 친구 없이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무게와 세월이 무엇인지, 이제는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 있는 나이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매번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지내는 내 모습이 괜히 미안해져서, 자꾸 그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엄마 아빠의 희생과 그 길 위에 쌓인 삶의 무게를 알아 갈수록 더욱 그렇다. 그리고 나는 부모님이 지금이라도 친구를 사귀었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생각도 든다. 더 이상 자식을 위해 고생하지 않고 조금은 즐기면서 인생을 사셨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애순이의 이야기는 사실 특별하지 않다. 오히려 아주 흔하다. 대한민국에서 부모의 사랑은 대개 자기희생을 전제로 한다. 그렇게 이루지 못한 부모의 꿈은 자연스레 자식에게로 향하고, 자식은 그런 부모와 부딪히며 성장한다. 드라마는 이 복잡한 관계를 아름다운 휴먼 스토리로 풀어냈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 사회의 여러 폐단이 발생하기도 한다. 부모의 과한 욕심과 왜곡된 애정이 자녀를 옭아매는 이야기를 조금 더하면, 드라마는 미스터리나 스릴러로 장르가 바뀔 수도 있다. 어쩌면 더 현실적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극 중에서 부모의 사랑을 ‘짝사랑’이라고 표현한 대목이 인상 깊었다. 실제로 2023년도 한국리서치의 가족 인식 조사에 따르면, 자녀가 있는 응답자 중 자녀와의 관계에 만족하는 비율은 65%로 높은 반면, 자신과 부모의 관계에 만족한다고 답한 사람은 53%에 그쳤다. 만족도가 곧 애정의 크기를 의미하진 않겠지만, 자식을 향한 부모의 일방적인 애정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 다른 금명이인 우리들은 부모의 자기희생에 죄책감과 부채감을 느낀다. 하지만 또 누군가의 부모가 되면서 애순과 관식처럼 묵묵히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된다. 드라마에서도 금명이가 애순과 관식을 이해하게 되는 장면이 중요한 갈등 해소의 순간으로 등장한다. 앞서 언급한 조사에서 흥미로웠던 또 하나의 결과는, 기혼자일수록 부모에 대한 인식이 좋아졌다는 점이다. 부모가 되어보니 비로소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일 테다. 그렇다면 나는 아직도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든다.

‘폭싹 속았수다’는 시청자들의 눈물과 웃음을 이끌어내며, 부모의 자기희생이라는 양날의 검을 솔직하게 비춘 드라마가 아닐까 생각한다. 일각에서는 부모의 잘못된 사랑까지 미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랑의 부재가 만연한 시대, 우리 존재의 시작은 결국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이야기가 탄생한 것에 대해 고마움이 먼저 든다.

나만의 애순이인 할머니를 떠올린다. 괴로웠던 삶의 기억을 조금씩 지우면서 가장 순수하고 즐거웠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나의 할머니. 가족을 위해 평생을 바치다 기억을 잃은 그녀를 생각하면 죄책감을 느끼지만, 그 사랑의 결실이 모이고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음을 잊지 않으려 한다. 부모님에게도 같은 마음이다. 그것이 지금껏 사랑을 주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드리는 나만의 조용한 보답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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