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국가연구소 유치로 여는 부산의 미래
김영부 부산과학기술고등교육진흥원장 한국과총 부울연합회 부회장
수도권 집중 국가 혁신 잠재력 제약
세계 혁신 클러스터 지역 경제 견인
집중서 분산으로 국가 전략 전환해야
지역 대학 주도의 혁신성장 첫걸음
NRL 2.0으로 혁신균형발전 꽃피길
부산은 역사적으로 과학기술 도시다. 고대 가야는 ‘철의 왕국’이라 불릴 만큼 정교한 제철 기술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고, 조선시대에는 동래와 부산포를 중심으로 해양 방어와 항해 기술이 발달했다. 조선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은 동래 출신으로 자격루와 측우기 등을 발명하며 시대를 앞선 과학 정신을 구현했다. 근대에는 육종학의 선구자인 우장춘 박사가 부산을 연구 거점으로 삼아 과학자의 길을 개척했다. 산업화 시대에는 기계, 조선기자재 등의 중심지로 부상했고, 오늘날에는 인공지능과 데이터 산업 등 미래기술을 통해 도시의 정체성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이처럼 부산은 과학기술의 전통과 미래 가능성을 동시에 품고 있는 도시다. 그러나 이러한 잠재력을 세계적 연구성과로 확장하기 위해서는 국가적 지원과 제도적 뒷받침이 절실하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올해 첫 시행되는 ‘국가연구소(NRL 2.0)’ 사업은 지역 주도의 과학기술 혁신을 이끌 기회로 주목받고 있다.
국가연구소는 대학의 강점 분야와 우수한 연구 인프라를 집약해 세계 최초·최고 수준의 혁신적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 목표다. 부산의 대학들도 본 사업을 준비하고 있으며, 부산시와 부산과학기술고등교육진흥원이 유치를 위해 힘을 모으고 있다. 이 연구소가 부산에 들어선다면 단순한 R&D 인프라 확충을 넘어, 부산을 미래형 과학기술 도시로 도약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다. 실제로 해외에서는 지방 대학의 연구소들이 지역 경제와 국가 전략에 깊은 영향을 미친 사례가 다수 존재한다.
독일의 ‘슈퍼클러스터(Exzellenzcluster)’는 특정 대학 중심의 연구 클러스터를 지정해 연구를 육성하고 지역 혁신 생태계를 조성한다. 미국 NSF의 ERC(Engineering Research Center) 프로그램 역시 지역 대학 기반 연구소가 산업과의 긴밀한 협력을 유도하고 있으며, 영국의Catapult Centre, 프랑스의 IDEX, 일본의 COE 프로그램도 유사한 목표를 지닌다. 특히 영국 스트라스클라이드 대학의 첨단성형연구센터(AFRC)는 제조업 중심의 스코틀랜드에 첨단기술을 접목해 산업 구조 전환을 이끌었고, 프랑스 그르노블 알프스 대학은 반도체 등 첨단기술 분야에서 세계적 거점으로 성장하며 지역 경제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연구소가 단순한 ‘지식 생산지’를 넘어, 기술혁신의 실험장과 국가 산업 전략의 실행 거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 우리나라는 모든 것이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어 지역의 자생적 성장을 제약하고 국가 전체의 혁신 잠재력에도 한계를 초래하고 있다. 지속 가능한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선 이제 ‘집중’에서 ‘분산’으로 전략적 전환이 필요하다.
과학기술의 잠재력을 품은 부산이 이제 나설 차례다. 국가연구소가 부산에 유치된다면, 이는 부산형 혁신균형발전 모델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기초과학 연구를 넘어, 지역 기업과의 기술협력, 글로벌 산학 프로젝트, 청년 고용 창출 등 다층적인 경제·사회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해외 사례처럼, 지역에 정착한 고급 인재들은 장기적으로 지역 사회에 경제적·문화적 파급 효과를 남긴다. 부산의 산업 기반과 연구 역량은 이러한 변화를 이끌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부산은 단지 과거의 영광에 머무는 도시가 아니다. 오늘을 준비하고 내일을 설계하는 과학기술 혁신도시다. 필요한 것은 정부의 결단과 지역의 확고한 의지다. 수도권 중심의 연구개발 체계를 넘어, 지역이 주도하는 혁신성장 모델의 첫걸음, 그 출발점이 바로 ‘부산의 NRL 2.0 유치’가 되어야 한다. 이는 단지 한 지역의 발전을 넘어, ‘혁신균형발전’과 ‘기술주권강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 지혜로운 국가 전략이 될 것이다.
인류 최초의 발명품이 이쑤시개였다는 말이 있다. 작고 평범해 보이지만, 진정한 발명은 일상의 불편을 해결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데서 출발한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부산의 한 대학 연구실에서 세상을 바꿀 혁신이 태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부산이 간직한 과학기술의 전통과 잠재력이 국가연구소라는 플랫폼을 통해 꽃필 때,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지역 균형발전과 국가 경쟁력 강화를 동시에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