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탄핵 포비아'가 이끈 역주행의 결말은
전창훈 서울정치팀장
비상계엄에도 사죄·반성·쇄신 없었던 국힘
2017년 탄핵 경험자들 '공포 마케팅'이 배경
상식 거스른 역주행, 오히려 더 멀어진 재집권
이대로는 2017년 답습, 남은 30일 반전에 달려
‘12·3 비상계엄’이 실패로 끝나는 순간, 공동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여당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는 자명했다. 정적 제거에 군을 동원한 시대착오적이고, 위험천만한 대통령은 더 이상 권좌에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상당한 고통의 시간을 감수하더라도 철저한 사죄·반성·쇄신에 나서는 것이었다. 잘못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른 뒤 재기에 나서는 지극히 상식적인 경로다. ‘차떼기당’으로 무너지던 한나라당의 ‘천막당사’가 그랬고, 2007년 대선 폭망 이후 친노(친노무현) 핵심의 ‘폐족’ 반성과 총선 불출마가 그랬다.
그러나 국민의힘은 이번엔 정반대 방향으로 ‘역주행’했다. 대통령의 ‘버티기’를 엄호하면서 “계엄은 이재명 민주당의 폭거 때문”이라고 받아쳤다. 염치 불구하고 이대로 머리를 숙이면 ‘보수 궤멸’이고, 공격이야말로 최상의 방어라는 논리가 횡행했다. 근거는 2017년 경험한 탄핵의 공포였다. 당 중진, 영남권 의원 등을 중심으로 “탄핵으로 남은 것은 정치 보복, 적폐 수사 뿐”, “이번에도 무너지면 20년 동안 정권을 잡기 어렵다” 등 ‘탄핵 트라우마’를 부추기는 경험담이 초·재선들의 상식적 판단을 압도했다. “탄핵 반대해 욕 많이 먹었지만, 1년 후에는 ‘의리 있어 좋다’며 찍어주더라”는 어처구니 없는 무용담도 회자됐다. 여기에 ‘정치 보복은 몰래 하는 것’이라는 ‘이재명 포비아’가 공포를 배가했다.
결국 계엄을 막고, 탄핵을 이끈 당 대표가 ‘배신자’ 질타 속에 쫓기듯 사퇴했다. 대통령의 일탈을 가장 크게 책임져야 할 친윤(친윤석열) 핵심들이 다시 당의 방향타를 쥐었다. ‘국정 농단’과는 비교할 수 없는 비상계엄이라는 엄중한 사태에도 사죄는 미미했고, 누군가 책임 지는 일도, 뼈를 깎는 쇄신도 없었다. 대신 “계엄으로 민주당의 국정마비, 국헌문란 행태들을 국민들이 알게 됐다”며 당 지도부가 ‘계몽령’을 실제인 양 언급했다. 군인들이 국회와 선관위를 침탈하는 장면을 온 국면이 실시간으로 지켜봤는데도 말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대통령의 궤변처럼, 국민의힘에서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상식을 뒤집은 역발상(?)은 일순 성공하는 듯했다. ‘광장’의 결집이 이뤄졌고, 대통령의 지지율이 치솟는 기현상이 나타났다. 2017년과는 사뭇 다른 전개에 “우리 전략이 맞았다”는 환호성이 당내에 울려퍼졌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헌법재판소의 만장일치 탄핵 선고로 조기 대선이 시작되면서 역주행에 대한 ‘과태료’는 시시각각 쌓이고 있다. 분당은 없지만, 분열은 현재진행형이고, 결별하지 못한 전직 대통령은 탄핵의 강 앞에서 당의 발목을 단단히 잡고 있다. 그토록 “이재명은 안 돼”를 외쳤지만, 민주당 이 후보가 보수 후보 전체 지지율을 압도하는 대선 구도는 변함이 없다. 해양수산부 이전 공약에 부산이 들썩이고, 기획재정부의 예산 편성권을 대통령실에 두겠다는 발상에 국민의힘이 “제왕이 되려 하느냐”고 발끈하는 모습 자체가 이 후보에게 대선 주도권이 넘어갔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2017년 보수는 궤멸적 타격을 입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대통령 탄핵이라는 미증유의 사태를 겪으면서 아픔과 상처가 없을 수 있나. 그 과정이 쌓여 5년 만의 정권 탈환이 이뤄질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설픈 탄핵 경험에 기대 아픈 정공법을 피하고 존재하지 않는 우회로를 찾으려니 더 큰 궁지에 몰린 형국이다.
국민의힘 5개월 전으로 돌아가 대통령과 깔끔하게 결별하고, 친윤 핵심이 2선으로 물러난 뒤 ‘이재명 민주당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해 마지막 기회를 달라’고 절절하게 호소했으면 어땠을까? ‘육참골단(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이라고 했다. 아무런 변화도 희생도 없이 3년 전부터 줄창 틀어댄 ‘반 이재명’의 낡은 레코드로는 중도층의 귀를 사로잡을 수 없다.
국민의힘의 소위 전략가들이 짜고 있는 ‘빅텐트’가 구원의 동아줄이 될 수 있을지도 현재로선 회의적이다. 2002년 정몽준-노무현 단일화는 서로 다른 영역을 차지한 두 후보의 확장형 연대였고, 불리한 여건을 수용하고 정면 승부에 나서는 드라마가 있었다. 탄핵된 정부의 총리와 하는 ‘동종교배’가 이런 감동과 변수를 만들 수 있을까. 그저 단일화라는 정치 기술 만으로 국면을 뒤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면 유권자들의 수준을 너무 낮게 보는 것이다.
최근 만나본 국민의힘 의원들은 ‘반 이재명’ 정서에 기대 어차피 ‘51대 49’ 싸움이라며 2022의 박빙 대선을 그리는 모습이다. 그러나 나는 어째 2017년의 전철을 고스란히 밟아가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입법부와 행정부를 완전 장악한 절대 권력의 탄생이 임박한 지금, 견제 세력의 지리멸렬은 정치를 넘어 국가적 위기 요인이다. 남은 30일, 보수는 과연 희망의 불씨를 지필 수 있을까?
전창훈 기자 jch@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