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이심인데 아직 유심 꽂힌 한국 [비즈앤피플]
이심 대중화시대 열리나
유심 교체 대란 이후 통신사 관행 비판
해외여행용 ‘트래블 이심’ 수요도 급증
실물 유심 불편함 드러나며 전환 가속
이심 전용폰 출시되며 시장 확대 전망
KT가 해킹 피해 후속 대책으로 전 가입자를 대상으로 무상 유심 교체를 시작한 지난 5일 서울 KT플라자 여의도역점에 유심 교체 안내 포스터가 붙어 있다.(위) 지난 5월 서울 시내 한 SK텔레콤 공식인증 대리점에서 고객들이 유심 교체를 위해 대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SK텔레콤에 이어 KT가 해킹 피해에 따른 ‘유심(USIM) 교체’에 나서면서 이동통신 서비스 가입자들의 불편이 커졌다. KT는 대리점 방문이 어려운 가입자가 ‘셀프 교체’를 할 수 있도록 유심 택배 배송도 운영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통신사들이 ‘유심 장사’를 위해 이심(e-SIM, embeded USIM) 전환을 미룬 탓에 소비자의 손해와 불편이 커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비싸고 불편한 유심 교체
무단 소액 결제 피해가 발생한 KT는 12월 3일부터 유심 무상 교체 대상 지역을 전국으로 확대한다. 이에 따라 부산, 울산, 경남의 KT 가입자들도 유심 교체를 할 수 있게 된다. KT 유심 교체 대상자는 약 1600만 명(알뜰폰 300만 명 포함)이다. 앞서 유심 교체를 실시한 SK텔레콤은 교체 대상자가 약 2500만 명(알뜰폰 200만 명 포함)에 달했다.
SK텔레콤과 마찬가지로 KT도 대리점에서 유심을 교체하기 위해서는 홈페이지나 전화로 사전 예약을 해야 한다. SK텔레콤의 경우 실물 유심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면서 유심 교체에 수개월이 걸렸다. KT는 지역별로 교체 시기를 나눠 유심 수급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해킹 사고에 따른 교체가 아니라도 유심 교체는 비용 부담이 있고 불편하다. 국내에선 통신사를 바꿀 경우 유심 비용을 지불해야 하고 택배나 대리점 방문을 통해 실물 유심을 확보해야 한다. 국내 통신사가 청구하는 유심 비용은 5500~7700원이다. 일반 유심은 5500원이고 유심에 금융 기능을 탑재해 신용카드, 공인인증 기능을 이용할 수 있는 금융 유심은 7700원이다.
반면 이심의 경우 실물 유심 없이 통신사의 QR코드 스캔 등으로 간단하게 유심 교체의 효과를 볼 수 있다. 이심은 발급 비용도 실물 유심의 절반 정도다. 다만 이심은 실물 유심 기능을 휴대전화에 담은 단말기에서 사용할 수 있다. 국내에 이심 단말기가 많이 보급되고 통신 3사가 이심 활용에 적극 나섰다면 해킹 피해에 따른 유심 교체는 유심 확보, 가입자 대기 등의 불편 없이 단기간에 완료됐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해외에선 보급률 높아지는 이심
세계이동통신사업자연합회(GSMA) 조사에 따르면 미국에서 소비자들이 이심을 이용하는 비율은 올해 40%에 달할 전망이다. 이는 전 세계적인 이심 보급률 5%와 큰 차이가 있다. GSMA는 2030년에 이심 보급률이 전 세계적으로 55%, 미국에서는 84%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심 보급을 이끄는 것은 해외 여행객을 겨냥한 여행용 이심(Travel e-SIM)이다. GSMA에 따르면 미국 등 주요 11개국에서 해외 여행에 여행용 이심을 사용하는 비율은 51%에 달한다. 여행용 이심은 여러 국가의 통신 서비스에 접속할 수 있도록 하는 상품이다. 과거에는 해당 국가 전용 실물 유심을 구매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심 서비스가 활성화되면서 최근에는 여행용 이심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다.
여행용 이심 시장이 커지면서 에어알로(Airalo), 올라플라이(Holafly) 등 전문 업체들이 등장해 200개 이상 지역에서 사용할 수 있는 이심을 판매하고 있다. 영국의 대형 통신사인 보다폰도 200개 국가 이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이심을 판매하고 있다. 보다폰 여행용 이심은 기존 번호를 사용하면서 여러 국가에서 별도의 통신사 접속 절차 없이 이동통신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통신사 이외에 남미 최대 항공사인 라탐항공도 여행용 이심 판매에 나서는 등 경쟁이 심화되는 모습이다.
시장 조사 업체인 모도어 인텔리전스는 북미 이심 시장 규모가 2025년 47억 달러(약 6조 9000억 원)에서 2030년에는 66억 달러(약 9조 7000억 원)로 성장, 연평균 7.1%의 성장률을 보일 것으로 전망했다. GSMA 리서치앤커머셜콘텐츠 책임자인 파블로 이아코피노는 최근 GSMA 인텔레전스 웨비나에서 “핀테크 기업이나 항공사까지 이심을 판매하면서 시장이 커지고 있다”면서 “향후 물류나 사물인터넷 분야에서도 이심 활용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이심은 여행용 이외에 스마트워치나 고정형 무선통신(fixed wireless access, FWA)에서도 적극 활용되고 있다. 올해 상반기까지 미국에서만 이심을 사용하는 스마트워치나 태블릿이 123종이나 판매됐다. 유선통신망 없이 4G나 5G 등 무선망을 활용해 와이파이처럼 인터넷 환경을 제공하는 FWA 역시 이심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전 세계 78개 국가에서 161개 사업자들이 5G FWA에 이심을 사용한다는 게 GSMA의 설명이다.
실물 유심 활용한 가입자 묶어두기, 한계 보인다
이처럼 해외에서 이심 사용이 확대되는 것과 대조적으로 한국에서는 이심 보급률이 낮다. 국내 이심 보급률은 1% 미만이라는 게 통신업계의 분석이다. 편리하고 저렴한 이심이 국내에서 활성화되지 않는 데 대해선 통신사들의 ‘유심 장사’가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통신사들은 실물 유심을 7700원에 판매하고 있지만 실제 도입 단가는 2000~3000원 정도라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유심 원가 논란은 2017년 국정감사에서 당시 더불어민주당 소속이던 변재일 의원이 업계의 ‘유심발주 계약서’를 공개하면서 처음 불거졌다. 당시 공개된 계약서에 따르면, 금융 기능이 없는 4G 유심 납품 가격은 개당 1000원이었다. 이 때문에 국내 통신 3사가 2013년 이후 5년간 유심 판매로 7000억 원에 달하는 수익을 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통신사들은 최근에도 7700원에 판매하는 유심 원가가 4000원대라고 주장했다. SK텔레콤은 해킹 사고로 유심 무상 교체에 나서면서 “유심 원가는 4400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업계에선 유심 원가를 개당 2000원 안팎으로 보고 있다. 국내 통신사들은 이심에 대해서도 2500원의 ‘발급 비용’을 받고 있는데 이는 다수 해외 통신사들이 이심 발급 비용을 별도로 받지 않는 것과 대조적이다.
국내 통신사는 이심 기능을 보유한 단말기 판매에 소극적이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 삼성전자 단말기를 기준으로 국내 통신사들이 판매한 단말기의 경우 이심은 갤럭시 S23 시리즈 이상, 갤럭시 Z4 시리즈 이상, 갤럭시 A 35 시리즈 이상에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해외 출시 삼성전자 단말기에서는 갤럭시 S20 시리즈 이상, Z폴드 3시리즈 이상, A23 시리즈 이상에서 이심을 사용할 수 있다.
통신사들의 ‘이심 기피’에 대해선 번호이동 절차를 번거롭게 유지해 가입자를 묶어두는 전략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미국의 ‘포브스’는 최근 보도를 통해 “이심은 몇 분 만에 간단히 통신사를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통신사들의 가입자 묶어두기(lock-in) 전략을 무력화시킨다”면서 “통신사들은 보다 쉬운 통신사 변경이 수익 감소로 이어질 것을 두려워해 이심 활성화에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통신사들의 이심 기피 전략도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단말기 제작사들이 ‘이심 전용 단말기’를 출시하고 있어서다. 최근 출시된 아이폰17에어는 이심 전용으로 설계된 애플의 첫 번째 스마트폰이다. 애플은 실물 유심 공간을 제거해 얇은 기기 본체 안에 더 큰 배터리를 탑재할 수 있었다. 휴대전화 단말기 기능이 갈수록 고도화되면서 실물 유심 공간은 결국 다른 기능을 위해 축소되거나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실제로 스마트워치나 사물인터넷(IoT) 기기의 경우 이심 전용 기기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김종우 기자 kjongwo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