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왜 면박을 주면 안 되나
대통령 신년 업무보고 흥행 성공
일부 언론·야당 “면박 주기” 비판
공직사회 긴장 높이기 필수불가결
공공기관장 무능·안일함 타파해야
시즌2는 답습 넘어 발전되길 기대
지난 23일 해양수산부 업무보고를 끝으로 3주에 걸친 정부 부처 및 산하기관 업무보고가 마무리됐다.
역대 정부 최초로 생중계가 됐던 부처 업무보고는 분명 이전과 달랐다. 국민 앞에 공개됐고, 생중계됐으며, 대통령은 장관과 공공기관장들에게 직접 질문을 던졌다. 업무보고는 더 이상 책상 위 문서가 아니라, 국민이 지켜보는 현장이 됐다.
그동안은 무엇을 결정하는지, 누가 책임지는지 국민은 알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신년 업무보고는 최소한 권력이 숨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업무보고 현장 벽면에 붙어 있는 ‘국민께 보고드립니다’라는 문구는 이번 정부의 소통과 투명성을 강조하는 의미를 담았다.
공개와 질문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의 기본 조건이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공개가 곧 개혁은 아니라는 점이다. 카메라가 켜졌다고 해서 국정이 자동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문제는 대통령이 아니라, 대통령 뒤에 숨은 사람들이다. 이번 업무보고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장면은 대통령의 질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기관장들, 원론적 답변으로 시간을 끄는 고위 관료들, 책임 대신 ‘검토 중’이라는 말로 빠져나가는 행태였다.
국정의 병목은 대부분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정책 의지는 위에 있지만, 실행은 아래에서 멈춘다. 권한은 있으나 책임은 지지 않는 구조, 자리는 차지하되 결과에는 무관심한 기관장들. 생중계가 불편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민 앞에서 설명해야 하는 순간, 그동안의 무능과 안일함이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이번 업무보고는 기관장들에게 불편한 진실을 들춰냈다.
일부 언론과 야당에서는 ‘면박 주기’ ‘공직사회 압박’ ‘전 정부 인사 찍어내기’ 등 여러 이름으로 이번 업무보고에 비판을 쏟아냈다.
물어보자. 면박을 주면 왜 안 되나. 공직사회에 압박을 주면 왜 안 되나.
민간 기업에서는 어찌 보면 그 정도의 면박은 허다하다. 일을 못 하면 그보다도 더한 면박을 넘어 질책을 받는다. 직장인들은 그걸 묵묵히 감수하면서 실력을 키워나가고, 그런 효율성을 바탕으로 기업은 발전한다.
공직사회를 예외로 두면 안 된다. 그냥 대충 월급이나 받고 시간을 때우자고 장관이나 공공기관장을 해선 안 된다. 기관장 정도 하려면 전문성을 갖추고 어떠한 질문에도 답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춰야 한다. 선거 때 캠프에 있었다는 이유로, 고위층에 줄을 댔다는 이유 등으로 얼떨결에 된 ‘낙하산 기관장’은 이제 그만 보고 싶다.
으레 대통령 업무보고 때는 밑에 직원들이 만들어준 보고서를 보면서 읽어 나가고, 대통령은 듣기만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풍경. 이런 모습에만 익숙해져 있다가 약간의 격노와 공격적인 질문은 다소 낯선 광경일 수 있지만, 행정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공직사회의 긴장도를 높이는 건 필수불가결하다.
대통령실에서 기획된 생중계 신년 업무보고가 의도한 것이든 그렇지 않든 공직사회의 민낯이 드러난 이상, 이젠 이번 정부의 공직사회 개혁은 하나의 당면 과제가 됐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과를 내지 않아도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시스템이 지속된다면, 이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아무리 생중계하고, 아무리 강한 질책을 해도 현장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해수부를 마지막으로 신년 업무보고는 끝났지만, 시즌2가 예고됐다. 이재명 대통령은 6개월 뒤 새로운 방식으로 업무보고를 해보자고 제안함으로써 관심이 쏠린다.
이 대통령은 “업무보고를 통해 소통을 강화해야 공직사회 전체가 살아 움직인다. 넷플릭스보다 재미있다는 평가가 있다”며 긍정적인 측면만을 강조했지만, 대통령의 자성과 준비도 더 필요하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는 정책이 된다. 그래서 즉흥은 위험하고, 준비되지 않은 발언은 혼란을 낳는다. ‘환단고기’ ‘탈모약 건강보험 적용’ ‘촉법 소년 연령 하향 검토’ 등 평소 잘 알고 자신 있는 분야라고 해서 즉흥적으로 지시를 쏟아내며 국정에 혼선을 초래하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
대통령의 언어가 반드시 절제돼야 한다고 말하고 싶진 않지만, 괜히 지엽적인 것이 논란으로 부각되면서 꼬투리 잡히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강한 리더십은 목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한 번 던진 방향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일관성에서 나온다.
이번 업무보고가 ‘소통의 출발점’으로 기록될지, ‘정치적 장면’으로 소비될지는 대통령의 실행 의지에 달렸다. 시즌1이 흥행에 성공했다고 해서 이에 자만한 채 시즌1을 답습하는 시즌2를 국민은 원치 않는다.
시즌2에서는 대통령이든 공직사회든, 좀 더 발전된 모습을 기대한다.
최세헌 편집국 부국장 cornie@busan.com
최세헌 기자 corni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