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보공단, 담배 회사 상대 항소심 패소에 "과학·법 괴리 커… 실망스럽고 아쉬워"
정기석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이 15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주요 담배회사들을 상대로 제기한 대규모 손해배상 청구 소송 2심 패소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기석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이 '담배 소송' 2심에서도 공단이 패소하자 "과학과 법의 괴리가 크다. 실망스럽고 아쉬운 판결이지만 언젠가는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5일 서울고등법원은 건보공단이 KT&G, 한국필립모리스, BAT코리아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대해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앞서 건보공단은 "흡연 때문에 추가로 부담한 진료비를 물어내라"며 2014년 4월 담배회사들을 상대로 총 533억여 원의 배상금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533억원은 30년·20갑년(하루 한 갑씩 20년) 이상 흡연한 뒤 폐암, 후두암을 진단받은 환자 3465명에게 공단이 지급한 급여비(진료비)다.
건강보험공단은 "흡연의 중독성과 폐암 발병에 인과성이 있으므로 흡연으로 인한 재정 손실 책임을 담배 회사에 물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이에 담배회사들은 "흡연은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므로 제조사의 책임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2020년 1심은 "1심은 대상자들이 흡연에 노출된 시기와 정도, 생활 습관, 가족력 등 흡연 외의 다른 위험인자가 없다는 사실이 추가로 증명돼야 한다"며 건보공단 패소로 판결했다.
항소심의 판단도 같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원고의 보험급여 지출은 보험법이 예정한 바에 따른 의무 이행"이라며 "피고의 위법행위가 아니라 보험계약에 따른 지급으로 봐야 하므로 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에서 건보공단은 "피해자인 환자들의 치료비로 급여를 지출했으므로 환자들을 대위(권리를 대신 행사)해 이들의 손해배상을 구한다"고 주장했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재판부는 흡연과 폐암 발병의 인과관계에 대해 "개인이 흡연을 했다는 사실과 폐암에 걸렸다는 사실이 증명됐다고 해서 그 자체로 양자 사이의 개별적 인과관계를 인정할 개연성은 증명됐다고 볼 수 없다"는 대법원 판례를 들었다.
흡연과 폐암 사이 개연성을 인정하려면 개인이 흡연한 시기와 흡연 기간, 폐암 등의 발생 시기, 건강 상태, 생활습관, 질병 상태의 변화, 가족력 등의 사정을 따로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역학적 상관관계만으로도 흡연과 폐암 발생 사이의 인과관계를 추정할 수 있다"는 건보공단 주장에 대해서도 "역학적 연구 결과가 특정 개인의 질병에 대한 개별적 원인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주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건보공단은 "의존성을 유발하지 않는 수준으로 니코틴 함량을 줄인 담배를 제조해야 한다"고도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흡연자에 따라 니코틴 흡입량이 달라질 수 있어 의존성이 생기지 않는 함량 설정이 어렵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날 판결에 대해 정 이사장은 "과학과 법의 괴리가 이렇게 클 줄 몰랐다"며 "담배를 피우면 100%는 아니지만 폐암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은 과학적 진실이며 고혈압, 당뇨 등은 모두 담배가 유발하거나 악화시키는 병"이라고 지적했다.
또 "담배의 유해성에 대해 법원이 아직도 이렇게 유보적인 판단을 하는 것은 비통한 일"이라고 한탄했다.
정 이사장은 "판사가 집단 코호트 연구 결과를 개인 단위로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면서 "공단이 가진 역학 자료에는 소세포암의 경우 98%가 담배로 인해 생겼다는 결과가 나와 있다. 그러면 거꾸로 폐암 환자 중 담배로 인한 환자가 단 한 명도 없다고 얘기할 수 있느냐"고 비판했다.
이어 "담배에 중독성이 있다는 것도 역시 (의학)교과서에 다 나오는 얘기"라면서 "중독성을 병원에서 진단받은 분들이 계신다"고 강조했다.
그는 "차가 교통사고를 내 사람들이 다치고 사망했는데 운전자가 도망가 버린 격"이라며 "담배 회사는 뺑소니범"이라고 날 선 목소리를 냈다.
김주희 부산닷컴 기자 zoohihi@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