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용지만 있으면 참정권 보장되나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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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지방선거 결과 드러난 민심은 '견제'였다. 김종진 기자 kjj1761@ 이번 지방선거 결과 드러난 민심은 '견제'였다. 김종진 기자 kjj1761@

이번 지방선거에서 민심은 절묘한 견제구를 날렸다. 오만에 빠진 집권세력과 '윤 어게인' 환상에 빠진 야권 모두에 경고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이 같은 선거 결과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욱 국민적 관심을 끈 것은 역시나 선관위의 무능 혹은 부패에 기인한 것으로 보이는 참정권 침해 논란이다. 투표용지 부족으로 빚어진 참정권 침해 논란은 유권자들의 다양한 참정권 침해 우려로 확산하는 중이다.

이번 지방선거는 그렇게 끝이 났으나 우리에겐 아직도 많은 선거가 남아 있다.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를 도입하고 그것을 신줏단지처럼 신봉하고 사는 게 우리 사회인 이상 선거를 피할 도리는 없다. 하지만 선거라는 것은 투표장에 나가 투표용지를 받아 기표만 하고 끝내는 간단한 일이 결코 아니다. 유권자가 하는 그 간단한 기표행위의 결과로 나의, 가족의, 지역사회의, 국가의 운명까지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의 기표행위는 우리가 가진 참정권 즉,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정말 보장해 주는 것인가.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일인 지난 3일 부산 부산진구 양정자이더샵에스케이뷰 2단지에 마련된 양정2동 제4투표소를 찾은 시민들이 투표를 하고 있다. 김종진 기자 kjj1761@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일인 지난 3일 부산 부산진구 양정자이더샵에스케이뷰 2단지에 마련된 양정2동 제4투표소를 찾은 시민들이 투표를 하고 있다. 김종진 기자 kjj1761@

■기표의 곤란함

선거철만 되면 온갖 매체가 일제히 유권자들에게 제대로 된 선택을 강요하는 일이 반복된다. 유권자들은 선거 공보에 드러난 얄팍한 정보와 각종 구호, 이미지 같은 것들 외에는 후보에 대해 깊이 알 수 없음에도 막무가내로 올바른 선택을 강요당한다. 이런 일에 신물이 났는지 영국의 세계적 석학 리처드 도킨스는 유권자들의 투표 행위에 대해 이런 표현을 한다. “차라리 아인슈타인이 대수 계산을 제대로 했는지 전 국민 투표를 실시하거나, 비행기 조종사가 어느 활주로에 착륙해야 할지 승객들이 투표하게 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그렇게 어려운 기표행위를 유권자들은 척척 해내고 선거 결과가 나오면 현명한 선택이 이뤄졌다며 선출권력을 무소불위인 것처럼 휘두르는 것이 우리의 민주주의다.


지난달 21일 부산 연제구의 한 도로변 담장에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후보자의 선거 벽보가 부착돼 있다. 부산일보DB 지난달 21일 부산 연제구의 한 도로변 담장에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후보자의 선거 벽보가 부착돼 있다. 부산일보DB

■후보의 적절성

유권자의 기표행위가 있으려면 당연히 선거에 나오는 후보가 있어야 한다. 그게 선거라는 제도의 본질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권자는 후보가 선정되는 과정에서 철저히 소외된다. 공당의 공천이 대세를 이루지만 그 과정조차 당원이 아닌 이상 소외되기는 마찬가지다. 설령 당원이라 하더라도 본인이 원하는 후보가 공천이 된다는 보장도 없다.

유권자는 선거에서 자신이 찍을만한 후보가 없다고 판단할 경우엔 정말 선택지가 없는 것일까. 후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선거 참여를 포기하는 건 주권을 포기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그렇다고 어쩔 수 없이 참여한 선거에서 가장 덜 부적합해 보이거나 차악이라고 생각하는 후보만 선택해야 하는가. 그렇게 어쩔 수 없이 객관식 문항 선택하듯 선택한 결과가 스스로 최상위 권력이라 일컫는 선출 권력이 되는 것이 진정한 참정권 행사라 할 수 있는가.


전국동시지방선거일을 하루 앞둔 지난 2일 오후 부산교대 체육관에 마련된 개표소에서 김문관 부산시선관위 위원장과 위원들이 투표지 분류기 모의시험 등 개표 준비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정종회 기자 jjh@ 전국동시지방선거일을 하루 앞둔 지난 2일 오후 부산교대 체육관에 마련된 개표소에서 김문관 부산시선관위 위원장과 위원들이 투표지 분류기 모의시험 등 개표 준비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정종회 기자 jjh@

■거부권의 필요

최근 관련 학계에서는 유권자가 투표를 포기하거나 차악 혹은 덜 부적합 후보에 기표하는 방법 밖에 택할 수 없는 것은 선택 강요에 의한 참정권 침해에 해당한다고 짚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유권자도 후보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어야 진정한 참정권이 실현된다는 주장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외대 법학연구소의 문재완 교수가 이 같은 ‘후보자 거부권’을 내세우는 대표주자다.

후보자 거부권은 유권자가 적극적으로 밝히는 정치적 의사표현에 해당한다. 출마한 후보자 가운데 유권자가 적절한 후보자를 찾을 수 없는 경우 출마자 모두를 거부하는 방법이다. 투표지에 출마 후보 이름만 나열되는 것이 아니라 거부란을 별도로 둠으로써 유권자가 거기에도 표기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이 같은 방식은 투표를 포기하는 유권자에 대한 사회적 비판과 이에 따른 의무투표제 도입 필요성 주장 등과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의무투표를 법에 명시한다고 해도 유권자가 반드시 특정 후보를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 후보에게도 기표하지 않는 무효표를 던지는 것과는 또 다르다. 무효표가 주권의 포기에 가깝다면 후보자 거부권 행사는 아주 적극적인 주권의 행사여서다.


미국 대선 개표 과정에서 한 판사가 투표용지를 살피고 있다. 부산일보DB 미국 대선 개표 과정에서 한 판사가 투표용지를 살피고 있다. 부산일보DB

■운영의 어려움

그렇게 후보자 거부권을 도입하자는 여론이 모아진다고 해도 현실화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아직은 적지 않다. 우선 후보자 거부권 보장을 위한 선거법 개정이라는 산을 넘어야 한다. 투표용지에 정당과 후보자의 게재 순위 등을 규정해 놓은 선거법을 개정해 후보자 거부권 행사를 위한 ‘아무도 지지하지 않음’ 등의 기표란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개표 과정에서 후보자 거부권 기표가 최다일 경우의 처리 방법도 고민해야 한다. 일단은 재선거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지만 그렇게 하려면 선거비용 증가와 당선자 처리 지연 등 부작용도 만만찮다. 문재완 교수는 후보자 거부권 기표가 과반 혹은 최다일지라도 당선인을 결정하고 후보자 거부권 다수표 여론을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거론한다.

지금처럼 차악이나 덜 부적합한 후보의 선택을 강요당하는 선거 시스템이 앞으로도 계속 유효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는 한시라도 빨리 본격화해야 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후보자 거부권은 이 같은 논의의 촉발제로 충분한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뽑을 만한 후보가 없을 때 모든 후보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유권자에게 허하라!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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