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군사.행정 상황따라 성쇠 '요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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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옛날부터 양산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성격을 가지고 변천해 왔다.

그러나 삼국시대부터 중앙집권국가의 형태가 성립된 이후로는 양산지역에 대한 중앙정부의 관심 정도와 양산의 역할이 중앙에 대해 어느 정도 기여하였는가에 따라 양산지역의 규모와 성장은 달리해 왔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양산지역의 역사적 특징은 크게 두 가지 면에서 그 모습을 달리한다.

그 하나는 군사적.행정적 면이고 다른 하나는 오늘날과 같이 시장의 원리가 경제질서를 이루는 시대의 특징에서 볼 수 있는 경제적인 면이다.

군사적.행정적 역할에 의해 양산은 삼국시대에서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경주 다음으로 가장 발달했던 고도시(고도시)였다.

하지만 고려 이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역할의 의미가 상대적으로 감소하였기 때문에 성장에 변화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러나 가장 최근에 이르러 양산의 더욱 급속한 성장에 주요인으로 등장한 것은 후자의 경제적인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국가의 경제적 발전이 물류의 흐름을 원활히 하는 도로에 의존하는 바가 큰 것은 현재와 마찬가지로 과거에도 그러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므로 물류비를 낮출 수 있는 최단거리의 수송로는 도로의 효율성을 높이기 때문에 도로상에 위치한 지역에서는 원래 상업과 교역이 번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의 양산은 비록 당시의 수도인 경주에 이르는 최단거리의 육로에 위치하였지만 군사적 방어 요충지였기 때문에 도로의 역할은 경제적인 면에서보다는 군사적.행정적인 면에서 양산의 변화에 더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삼국이 통일된 후,보다 안정된 중앙집권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행정의 체계화와 법령의 정비만으로는 한계가 있었으므로 이를 보완하기 위한 불교의 장려는 무엇보다 필요하리라 보인다.

양산의 지역사에서 대표적인 상징물 가운데 하나인 통도사는 삼국이 통일되기 직전인 646년(선덕여왕 15년)에 창건된 절이다.

시대적으로 매우 격동기에 외적의 침략을 막고 국가의 영원한 태평을 기원하는 호국불교의 성격을 가진 사찰 중의 하나로 창건되었던 것이다.

당시 사찰들의 입지는 대부분 수도인 경주였지만 울산처럼 외적이 경주에 이르는 해상로나 또는 양산처럼 육로를 통해 경주에 이르는 길목이기도 했다.

자장율사가 당나라로부터 가져온 부처의 사리를 삼분하여 경주의 황룡사,울산의 태화사,그리고 양산의 통도사에 각각 안치한 이유도 국가의 수호와 태평을 기원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통도사가 창건된 당시는 삼국이 가장 치열한 투쟁을 벌이던 삼국통일 직전이었고 불교의 성격도 왕실 중심의 귀족불교였으므로 신라의 최대 목적인 삼국통일과 지역세력 무마를 위해 불교의 힘이 어느 때보다 절실했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통도사와 인접한 양산 관내에 경주로 향하는 35번 국도를 따라 산재해있는 삼국시대의 고분들과 여러 성(성)들은 당시의 상황과 지역세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처럼 통도사는 북정리의 부부총과 함께 양산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상징물이었던 것이다.

통도사의 금강계단 바로 옆에는 구룡지(구룡지)라는 작은 연못이 있다.

이 연못 속에는 그 당시 양산의 지배세력을 상징하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고 전하여지나 그 중 1마리의 용이 불사리가 안치된 금강계단을 수호하기 위해 남게 되었다는 설화에서도 이러한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양산은 일본에서 경주 뿐만 아니라 서울과 중국을 최단거리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간선대로에,또 경주.울산과 김해.마산간에 반드시 지나야하는 중간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신유한의 해유록(해유록)에서는 조선시대에 왜의 사신이 부산포에서 한양에 이르는데 16일이 소요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를 보더라도 양산지역은 당시의 수도인 한양에 이르는데 가장 빨리 도착할 수 있었던 대로상에 위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고려시대 이후 부산과 개성간에 개설된 간선도로는 양산의 중심부를 지나지 않고 외곽지역인 물금을 지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양산의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역할이 부산에 비하여 감소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의 양산은 가야와 백제 및 왜가 경주에 이르기 위한 주요 침입로에 위치하였다.

그러나 도읍이 경주에서 개성으로 옮겨짐에 따라 고려시대부터는 양산지역은 국방의 요충지로서의 군사적 기능은 상대적으로 저하되기 시작하였다.

그 대신 낙동강 옆에 위치한 양산 관내의 물금이 교통통신기관인 역참(역참)으로서의 역할이 증가하게 되었다.

한양 천도를 계기로 한양을 기점으로 새로운 교역망을 구축하게 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왜의 사신이 한양으로 가기 위해서는 해상로 이외에 4개의 도로가 있었다.

그 가운데 중로가 부산물금밀양대구서울로 이어지는 길이다.

지금도 물금역에서 경부선 철도를 따라 삼랑진 쪽으로 가다보면 기차가 지나가는 터널이 보이는데 그 위에 한양에 이르는 간선도로의 일부인 옛 황산로의 일부가 남아있다.

이 황산(황산)이란 이름은 물금의 옛 지명으로,그 앞을 흐르는 낙동강의 일부인 황산천이 있었고 물금에서 원동에 이르는 길인 황산로가 있었다.

이 도로의 일부는 1904년 경부선 철도가 건설됨에 따라 폐도화돼 대부분은 지금의 1022번 국도에 의해 대체되었다.

현재 그 흔적은 원동에서 삼랑진쪽으로 나있는 경부선 상.하행선의 터널이 뚫려 있는 벼랑바위 위에 폐도로서 남아 있을 뿐이다.

이처럼 고려시대 이후부터 서울에 이르는 간선도로는 현재의 경부선 철도와 비슷하게 발달되어 양산의 외곽지역인 물금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양산내륙은 군사적 기능이 떨어지면서 중앙정부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 양산에 인접하고 있는 대도시를 연결하는 도로의 경제적 기능이 증가,지역성장이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 예로서 얼마전에 개통된,경부고속도로와 김해 대저간 연결도로를 이용해 본 사람은 누구나 양산이 부산.김해.마산.울산.경주 등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양산이 부산 뿐만 아니라 마산,울산간의 경제적 교류지로서의 역할이 증대하리라는 것을 쉽게 이해하게 해준다.

이처럼 양산은 군사적.행정적.경제적면의 역할 변화에 따라 그 규모와 발달의 정도가 달라져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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