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로 푼 부산 설화] ⑦ 혼바산에 노을이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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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 상병, 龍으로 산화하다

그림=서양화가 박경효

# 의성(義城) 옛 성터 전설 / 부산 북구 덕천동 

옛날 신라의 영토였던 구포지역은 김해쪽 가야와 경계를 두고 있어 국경을 수비, 관찰하는 성을 쌓았다. 신라시대 왜구의 침략은 대부분 소규모로 강가의 마을을 습격하여 노략질을 해 갔는데, 한 번씩 대량의 군사를 동원하여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낙동강 하류지역을 공격해 오는 것이었다. 이곳에 있는 성부터 함락해야 내륙으로 통하는 길이 열리기 때문에 성은 왜구들의 집중공격을 받게 된 것이다. 신라 조정에서는 너무나 엄청난 왜구들의 난동에 고구려에 원병을 청원하는 사신을 보내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때 성을 지키고 있는 군사는 500여 명. 성주는 황룡(黃龍)이라는 장군이었다. 수천 명에 이르는 왜구들이 개미떼처럼 몰려와 성을 에워싸고 쳐들어오자, 황룡 장군은 군사들을 독려하여 나라를 위해 의로운 죽음을 남기라는 훈령을 내렸다. 이에 용기를 얻은 군사들이 성을 타고 올라오는 왜구들과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고 또 싸웠다. 결국 왜구들이 성을 함락했을 때는 500여 명의 군사가 거의 죽거나 전상을 입고 쓰러져 있었다. 현장에 올라온 왜구의 대장은 이렇게 전멸할 때까지 도망가지 않고 싸운 군사들의 모습을 보고, 더 이상 침략해도 승리하기 힘들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비록 전투에서는 이기긴 했지만 승리의 쾌감보다는 그 이상의 큰 충격을 받게 된 것이다. 기가 꺾인 왜구는 더 이상 침략을 포기하고 바다를 건너 되돌아갔다고 한다. 그래서 쑥대밭이 될 뻔했던 낙동강 유역의 주민들이 전쟁의 공포와 피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조정에서는 나라를 위하여 의로운 죽음을 택한 황룡 장군과 500여 명 군사들의 넋을 추모하는 뜻으로 이곳을 의성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자료제공=김승찬 부산대 명예교수



잠시 적요가 맴돌았다
또 한 발의 포탄이 날아와 탄약고 근처에서 터졌다
그 엄청난 폭발음 속에 죽음의 옷을 입은 망령들이
박쥐처럼 날개를 퍼덕이었다



포탄의 폭발음 사이 짤막한 정적을 타고 금속음향이 들려왔다. 싸아 싸아~. 철판을 때리는 가느다란 빗소리처럼 들려오는 그것은 옆의 호에서 들려오는 무전기 소리였다. 우리는 그쪽으로 귀를 바짝 기울였다. 이 시간에 나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이었다. 겨우 스물을 갓 넘긴 나이에 몸이 산산이 부서져 이승을 하직하고 말,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냉큼 나를 구해 줄 하느님. 그러나 하느님은 너무나 먼 곳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카랑카랑한 음성의 중대장에게서 하느님을 대신할 그 무엇을 기대하였다. 평소 중대장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그의 어떤 명령이라도 용기백배하게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젠가 우리에게 하였던 죽음의 계곡 운운하는 말도 바로 이런 경우를 뜻했을 것이었다.

지난번 작전 때였다. 그는 완전군장을 한 중대 대열 앞에 시퍼런 선글라스를 끼고 나타났다. 그리고 권총을 하늘을 향해 추어올리며 말했다.

"이 중대장과 함께라면……."

문득 거기서 중대장은 말을 끊었다. 우리는 침을 꿀떡 삼켰다. 그가 말을 이었다.

"죽음의 계곡까지라도 따라갈 수 있는 용사, 손들어 봐!"

그러나 선뜻 손을 올리는 병사는 없었다. 대신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피식 피식 새어나왔다. 중대장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다시 한 번 말했다.

"이 중대장과 함께 죽음의 계곡까지라도 따라갈 용사, 손들어. 없나! 없어?"

그제야 우리는 하나 둘 손을 추켜올리기 시작했다.

그래, 그가 말한 죽음의 계곡이란 바로 이것일 터였다. 우리의 머리 위로 포탄이 날아와 우리들의 생과 사를 가르는 바로 이 순간 말이다. 나는 다시 무전기에 온 신경을 다 쏟았다. 일어나라! 중대장은 그렇게 말할 것이었다. 일어나서 중대장과 함께 싸우자! 그럼 나는 이 오줌 냄새나는 참호에서 벌떡 일어나 무엇이든 해낼 참이었다. 하지만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너무나 엉뚱한 것들이었다.

-포 쏴. 포 쏴. 포 쏴.

-못 쏩니다. 못 쏩니다. 지금 나가면 다 죽어요.

서로 다른 음색으로 들려오는 그 소리는 중대장과 박격포 소대장의 말이었다. 중대장의 목소리는 분명 떨리고 있었다. 평소 무전에서 사용하는 음어나 약호는 한마디도 섞이지 않은, 포 쏴, 포 쏴 하는 단 두 음절의 다급하고 원색적인 말이 그걸 증명하였다. 아직 적의 포진지가 밝혀지지 않았고, 포탄이 우박 쏟아지듯 하는 상황에 누가 박격포가 있는 연병장으로 나가겠느냐는 화기 소대장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이 자리에서 콱 죽어도 좋을 것만 같았던 나의 사기는 일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파리에서 월남전 종식을 위하여 열리고 있는 평화회의 소식이 연일 들려오고 있었다. 이제 곧 휴전이 될 거다. 오는 크리스마스 전에 한국군은 모두 철수하고 미군만 남는대. 종잡을 수 없는 소문들이 병사들의 마음을 잔뜩 부풀리고 있었다. 그런 마당에 아무도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파리평화회의는 쉬 결말을 낼 낌새를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베트콩의 공세만 날로 드세어져 갔다. 월남정부군의 작전지역인 닌꽝이 함락되고 쾅나이가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아군 연대본부가 있는 나트랑 외곽도 적의 끈질긴 도전에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다.

나의 머리는 오직 살아야 한다는 명제로만 가득 채워져 있었다. 다른 어느 것에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여 정든 고향 땅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머리는 터질 지경이었다.

"쪼매이 좀 있어봐라!"

갑자기 곁에 있던 황지렁이가 부스럭거리는 나를 제지하였다. 나는 가자미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황지렁이가 누군가. 그의 원래 이름은 황룡이었다. 워낙 동작이 굼떠 용이라는 거창한 이름 대신 지렁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굼뜬 것은 행동만이 아니었다. 이따금 엉뚱한 소릴 해 대는 바람에 이 친구에게 생각이나 판단력 같은 게 있나 싶을 정도였다. 마흔아홉 소대원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음에도 그는 항상 뒤처져 있었다. 36개월 제대를 코앞에 두고서도 흔해빠진 병장 진급을 못한 채 상병에 머무르고 있는 것도 그 한 예였다.

황지렁이가 날 제지한 다음 순간 한 차례 포탄이 우리 코앞에 떨어졌다. 그의 말이 이렇게 정확히 맞아떨어진 것은 이변이라면 이변이었다. 이번에 포가 떨어진 곳은 화약고 근처였다. 중대본부, 취사반, 박격포 진지. 적들은 우리 중대기지를 손바닥처럼 바라보며 포를 갈기고 있었다.

"저그 저쪽."

혼바산 왼쪽 능선 뒤쪽 정글을 가리키는 황지렁이의 눈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반짝 빛나고 있었다.

"포 쏴 대는 소리가 저그 골짜기 한 가새서 나는 거 안 같나?"

나의 시선은 지렁이의 손끝을 황급히 따라갔다. 야자나무 숲이었다. 그곳엔 수백 그루의 야자나무들이 키 작은 열대우림 위로 뻗고 서서 성난 말갈기 같은 머리채를 허공에 풀어놓고 있었다.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니 거기 어디에서 '뽕'하고 포도주병 코르크 마개를 뽑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연이어 포탄이 재빠르게 하늘을 건너오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우리 중대기지가 와장창 내려앉았다.

"저쪽이다. 마, 저쪽이란 말이다!"

황지렁이는 옆 호에 있는 무전병을 향해 소리쳤다. 그쪽에서는 응답이 없었다. 몇 차례 고함을 질러도 응답이 없자 황룡은 돌멩이를 던졌다. 그제야 그쪽에서 철모를 뒤집어쓴 머리 하나가 삐죽이 올라왔다.

"저쪽이다. 혼바산 왼쪽 가새 야자나무 숲."

그러나 상황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다른 누구라면 몰라도 만년 상병 황지렁이의 소리를 귀담아들을 리가 없었다. 적의 포탄은 연이어 날아왔고 중대본부 옆에 팔각정 모양으로 보기 좋게 세워둔 전망 탑이 우지끈 무너지는 소리만 들려왔다. 쏘란 말야. 이건 명령이야. 적 포진지도 모르는데 엇다 대고 쏘란 말입니까? 무전기는 또다시 바빠지고 있었다.

그 어느 때였다. 나는 황지렁이의 눈빛이 달라져 가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언제나 깊은 수렁에 잠겨 있는 것 같던 그의 눈빛은 어디에서 솟아났는지 강렬한 광채로 채워지고 있었다. 황지렁이는 철모를 고쳐 쓰고 단단히 턱 끈을 조였다. 그를 바라보는 나의 숨이 가빠지고 있었다. 그 모습은 경건하였고 아름답게 느껴지기조차 했다. 한순간 그의 입에서 나지막한 한 소리가 퉁겨져 나와 나의 머리에 꽂혔다.

"나가자!"

그건 분명 그 혼자만의 중얼거림이었다. 그러나 그 소린 내게 여태껏 들었던 그 어떤 것보다도 준엄한 명령처럼 들렸다. 황지렁이는 자신의 명령과 함께 호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포복을 시작하였다. 우리가 있던 호에서 10여 미터 거리에 한 개의 박격포 진지가 있었다. 평상시 서너 걸음이면 닿을 거리였지만, 그가 기어가고 있는 동안 그곳은 십 여 리는 되는 듯이 느껴졌다.

그가 박격포 진지 안으로 잽싸게 기어들었을 때, 나는 깜짝 놀란 듯이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적요가 맴돌았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 또 한 발의 포탄이 날아와 탄약고 근처에서 터졌다. 그 엄청난 폭발음 속에 죽음의 옷을 입은 망령들이 박쥐처럼 날개를 퍼덕이었다. 만약 탄약고가 폭발한다면 여기에 남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전기도 공포에 질렸던지 더는 사람의 소리를 실어 나르지 않았다.

박격포 진지 옆, 포탄 보관용 호에서 대여섯 발의 포탄이 또르르 굴러 나왔다. 그리고 얼룩무늬 철모를 깊이 눌러쓴 황 상병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기민하게 몸을 움직여 포를 조작하였다. 몇십 초의 시간이 가슴의 퉁탕거림 속에 지나갔다. 세상은 조용했고 기괴했다. 마치 지하세계의 한 부분을 떠다 놓은 듯했다. 내 입에선 신음조차 새어나오지 않았다. 으스러져라 악 다문 입은 더는 열릴 것 같지가 않았다. 이윽고 조준을 끝낸 황룡은 포상 위에 널려져 있던 박격포탄을 포구에 밀어 넣었다. 슈쿵! 폭음과 함께 한 발의 포탄이 하늘로 치솟았다. 참으로 대단한 환희의 소리였다. 새로운 탄생과도 같은 기쁨을 그것은 주었다.

슈쿵! 슈쿵! 황 상병은 정신없이 포탄을 쓸어 넣고 있었다. 그러던 다음 순간 나는 무서운 완력에 의하여 짓눌리고 말았다. 지금까지의 어느 것보다도 크고 분명한 폭발음이 한순간 내 정신을 둘둘 말아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주 가까이, 그러니까 황룡이 있던 아군의 박격포 진지 근처에 적의 포탄이 떨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적의 포탄이 일으킨 화염이며 흙먼지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호 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병사들이 우르르 밖으로 기어나갔다. 그들은 쓰러진 박격포를 일으켜 세우고 조준을 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포탄을 나르고 있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사격을 시작했다. 슈쿵! 슈쿵! 슈쿵! 내가 대답 없는 하느님께, 그리고 중대장에게서 기대했던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고요. 지구 상의 모든 움직임이 정지해 버린 것 같은 고요가 흘렀다. 그것은 의외로 오래 계속되었다. 그리고 서서히, 아주 먼 데서 밀려오고 있는 물결처럼 한 소리가 솟아났다. 그것은 처음엔 아주 작게 그리고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그러나 곧 그 소리는 거대한 파도가 되어 하늘을 덮었다. 해제~. 해제에. 살았다~. 해제~.

환희에 찬 병사들의 대합창곡. 적의 포격이 끝난 것이었다. 우리가 적을 물리친 것이었다. 나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황지렁이 아니 황 상병이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없었다. 어디에서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럴 리가! 뒷골이 화끈 조여왔다.


최초로 사격을 가한 포진지에서 십 미터 떨어진 곳에서 한 병사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적의 포탄에 갈기갈기 찢어진 그 병사의 곁에서 황룡이라는 이름이 적힌 철모가 뒹굴고 있었다. 그 철모엔 붉은 핏방울이 팥알처럼 엉켜 있었다. 어느덧 어둠이 지고 있었다. 혼바산 너머 녹청색 하늘이 까맣게 저며 오고 있었다. 지금쯤 고향에도 해가 졌겠지. 언뜻 떠오른 생각에 내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부산일보 · 부산소설가협회 ·하나은행 공동기획



김헌일 소설가

◇약력=1986년 MBC 신인문예상. 1997년 한국소설 신인상, 10회 부산소설문학상. 소설집 '회색강'. 현 부산소설가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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