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주화 운동의 원류' 역사적 평가 시기 놓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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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주화 운동의 원류' 역사적 평가 시기 놓쳐

부마항쟁을 촉발시킨 부산대 학생들의 온천장 시위장면.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김탁돈) 제공

'제가 내려가기 전까지는 남민전이나 학생이 주축이 된 데모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현지에서 보니까 그게 아닙니다. 160명을 연행했는데 16명이 학생이고 나머지는 다 일반 시민입니다. 그들에게 주먹밥을 주고 경찰에 밀리면 자기 집에 숨겨 주고 하는 것이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들이 완전히 의기투합한 민란입니다. 주로 그 사람들의 구호를 보니까 체제에 대한 반대, 조세에 대한 저항, 정부에 대한 불신 이런 것이 작용해서 경찰서 11개를 불질러 버리고 이런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부마항쟁 당시 부산을 시찰한 뒤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하면서


△유신체제 종언 고한 부마항쟁

부마민주항쟁은 박정희 군부 독재정권 성립 이후 줄기차게 전개돼 왔던 60·70년대 민주화운동의 총결산이었을 뿐 아니라, 80년대 '서울의 봄'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민중민주운동의 모태였다.

부산대 정치외교학과 이행봉 교수는 부마항쟁을 "유신독재시대 민주화의 물꼬를 튼 최초의 민중항쟁이며 5·18과 1987년 6월 항쟁으로 맥을 잇는 민주화 운동의 원류"라고 규정했다.

지역사적으로 보면 부마항쟁은 4월 혁명 이후 부산지역에서 일어난 가장 충격적인 정치적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74년 이후 5년 동안 단 한번도 데모가 일어나지 않아 '유신대학'이란 오명을 썼던 부산대에서 발생한 시위가 파출소와 세무서 습격이라는 과격 양상으로 번지고, 거기에 수만 명의 시민이 가세했다는 사실은 유신정권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부마항쟁에 참여한 학생이건 시민이건 아무도 그렇게 시위가 폭발적으로 번져나갈 줄은 몰랐다. 시위를 막아야 할 경찰도 정권 핵심부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였다.

당시 경찰과 계엄당국에 연행됐던 1천563명 가운데 학생들은 대략 30%를 차지했다. 부마항쟁의 실제 주체는 중국집 배달원, 술집 종업원, 구두닦이, 반 실업 상태의 자유노동자들과 도시 빈민들이었다. 학생과 지식인은 항쟁 초기의 촉매제 역할에 불과했다. 부마항쟁은 경제위기, 사회 양극화, 사회·문화적 박탈감 등으로 억눌렸던 민중들의 울분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다.

부산과 마산에서 촉발된 유신체제 반대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였고 결국 부마항쟁 발발 10일 만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10·26 사태로 이어지면서 박정희 유신체제의 종언을 고하게 된다.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는 "김재규가 친형처럼 모시던 박정희를 '야수의 심정'으로 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필연적으로 확산될 반체제 시위에 대한 강경 유혈진압을 피해보려던 것"이라며 "부마항쟁의 충격이 유신 체제를 즉사시킨 것은 아니지만, 유신체제는 그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정점부터 무너져 내렸다"고 평가했다.


독재에 억눌렸던 울분 한꺼번에 폭발
5·18, 6월 항쟁 물꼬 튼 첫 민중항쟁
신군부 권력탈취로 잊혀진 역사 홀대


△부마항쟁은 왜 잊혀져 왔는가

부마항쟁은 한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연 '일대 사건'이었다. 4·19를 통해 이승만 독재체제가 막을 내렸듯이 부마항쟁을 통해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종말을 고했다.

하지만 부마항쟁은 한국 현대사에서 '4대 민주 항쟁'의 하나로 영원히 기념해야 할 중요한 역사적 유산임에도 불구하고 3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기억하지 않으려는 항쟁, 사람들의 뇌리에서 지워진 항쟁으로 외면받고 있다. 민주화의 역사 속에서 다른 모든 항쟁들은 명예롭게 기억되고 있는데, 유독 부마항쟁만 왜 불명예스럽게 잊혀져 왔을까?

이는 박정희 체제에 대한 당대와 현 세대의 엇갈린 태도가 주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박정희 체제와 부마항쟁은 하나를 긍정하면 반드시 다른 것을 부정할 수 밖에 없는 모순 관계라는 것이다.

전남대 김상봉 교수는 "김재규의 손에 암살됐다는 것이 박정희를 증오의 대상에서 연민과 동정의 대상으로 바꿔놓았을 뿐 아니라, 확산된 우리 사회의 보수적 기류가 힘에 대한 숭배로 대변되는 박정희 향수를 자극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역사적으로 부마항쟁이 5·18 광주민주화운동 직전에 일어났고 규모나 피해 면에서 그보다 작았다는 점도 감안해야 할 요인이다. 부마항쟁은 1980년 5월을 강타한 '서울의 봄'과 광주 항쟁의 뒷물결에 휩쓸려 버린 모양새가 됐다.

전남대 조정관 교수는 "광주항쟁의 타도 대상이 신군부 및 전두환을 정점으로 하는 독재체제로서 1987년 민주화시점에 현존하는 권력이었던 반면, 부마항쟁의 대상이 됐던 박정희 정권은 1979년을 끝으로 표면상으로는 종료된 것이어서 더 이상 기억할 필요성이 대두되지 않았다"며 "신군부의 권력 탈취로 부마항쟁은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역사적 타이밍을 놓쳤다"고 설명했다.

1990년 김영삼 대통령의 주도로 전격적으로 이뤄진 3당 합당은 지역주의의 대두와 부산 경남지역의 정치적 보수화 기류를 형성했다. 이는 결국 지역 내에서조차 부마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홀대하는 정치적 지형을 만들어냈다.

동아대 홍순권 교수는 "부마항쟁에 대한 진실 규명과 역사적 자리매김은 한국 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한 역사적 과제이며, 지역 내 민주주의의 발전 정도에 따라 그에 대한 의미 부여가 달라질 수 있다"고 진단했다.

부마항쟁이 잊혀진 역사가 되어 온 과정 그 자체가 우리 현대사와 민주주의의 수준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박태우 기자 wideney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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