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間(인+간)] 자유 DNA로 노래하는 강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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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뚤어진 세상 거꾸로 거슬러 온 '삐따기' 삶은 물음표 아닌 느낌표다

강산에는 "한참 방황하다 최근 몇 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음악에 집중하게 됐다"고 털어놨다. 박희만 기자 phman@

소나기 예보도 없었다. 천둥 번개가 치면서 장대 같은 비가 쏟아졌다. 그를 만난 날 하늘은 종잡을 수 없었다. 날씨만큼이나 종잡을 수 없는 그였다. '무식함이 힘'이라고 외치는 그는 과감하게 일을 저지르는 바람에 이런저런 구설에 오르기도 했지만 '자유'란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가수다. 악보도 볼 줄 모르고, 코드도 잘 모르면서, 기가 막히게 노래를 만든다. 남들과 다른 예민한 촉수로 포착한 느낌을 공감 가는 노래로 만드는 독특한 음악적 DNA를 가진 가수다.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삐딱하게 살아온 그가 올해로 벌써 데뷔 20년이다. 지난해 '키스'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정규 앨범도 8장 냈다. 지난 3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홍대 앞 지하 1층 연습실 '나비'에서 가수 강산에(49)를 만났다. 지난 1일 6인조 '밴드 강산에'를 이끌고 '합니다'란 단독콘서트를 하고 난 뒤였다.

'...라구요'(1993)-눈보라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 가보지는 못했지만/그 노래만은 너무 잘 아는 건/내 어머니 레파토리/그중에 십팔번이기 때문에/십팔번이기 때문에.

한국전쟁 때 흥남부두서 거제도로
한 살배기 형 안고 피난선 탄 어머니
데뷔 전 일본서 문득 떠오른 母情에
선물 대신 쓴 곡 '...라구요' 탄생

그 좋은 한의대를 그만둘 때도, 피어싱에 장발을 해도 쿨하게 넘기셨던 어머니였다. 강산에가 데뷔하기 전 일본에 있을 때였다. "하루는 문득 엄마가 생각났어요. 안부 편지를 쓰고 있었는데, 달랑 편지 한 장으론 부족하다 싶었어요. 엄마가 막내인 저에게 살아온 옛날이야기 하면서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셨어요. 내가 만든 노래를 엄마한테 들려 드리면 좋겠다 싶었어요. 테이프에 녹음해 편지와 함께 엄마에게 보냈어요."

엄마에게 들려 드리려고 만든 곡이 '...라구요'다. 씩씩하게 한국현대사의 질곡을 가로지르며 시대를 건너온 엄마의 삶이 녹은 노래다. 귀가 닳도록 들었던 이야기였다. "6·25전쟁이 없었다면 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거예요." 충청도에서 함경도로 시집간 강산에의 어머니는 한 살 된 강산에의 형을 안고 흥남부두에서 피난선을 탔다. 1926년생인 엄마는 피난 와 정착한 거제도에서 스물네 살 연상의 피난민이었던 아버지를 만났다. "고향서 피난 온 사람들끼리 만난 거지요. 20대의 엄마는 행상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텼고, 한의사였던 아버지는 기술이 있어서 제법 돈도 벌었대요."

강산에가 두세 살 되던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누나를 무릎에 앉힌 아버지의 흑백사진 한 장만 갖고 있어요. 아버지는 말년에 알코올 중독이 심했어요. 엄마 마음고생도 이만저만 아니었대요. 장롱에 쌓아둘 정도로 아버지가 돈을 많이 버셨다는데,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이리저리 떼여 돈이 바닥났어요. 제가 세 살 때 엄마가 아이 셋 데리고, 그때 돈으로 달랑 1만 8천 원 들고 부산으로 오셨대요. 부암동 산동네에서 살았어요."

강산에보다 열네 살 많은 이복형은 철공소 다니고, 엄마는 보험외판원을 하며 근근이 삶을 꾸려나갔다.

"엄마가 일하러 가시는 바람에 엄마 품에서 크지 못했어요. 열네 살 위의 형이 아버지인 셈이었어요."

'...라구요'는 즉흥 멘트로 마무리하는데, 한 번은 공연하다 울컥해서 10분가량 가만히 있었던 적이 있다. "여든일곱이 된 어머니는 이젠 부정할 수 없는 할머니가 됐어요. 곁에서 24시간 돌봐줘야 해서, 지금은 요양원에 계세요."

인터뷰 사진을 찍자고 했더니 강산에는 목청껏 `명태`를 부르며 연습실을 콘서트장으로 바꿔놓았다. 박희만 기자 phman@

'명태'(2002)-피가 되고 살이 되고/노래 되고 시가 되고/이야기 되고 안주 되고/내가 되고 니가 되고/그대 너무 아름다워요.

기타를 둘러메고 인터뷰 사진을 찍자고 했더니, 즉석에서 작은 콘서트를 했다. 함경도 사투리가 랩으로 들어간 '명태'란 노래다. 카메라 속으로 들어올 듯 얼굴을 들이밀면서 내뱉는 가사가 이랬다. '영걸이 왔니 강산에는 어찌 아이 왔니.' 원가사는 이렇다. '영걸이 왔니 무눙이는 어찌 아이 왔니.'

"부암동에 살 때 주인집 할아버지도 함경도 분이었어요. 그 집에 누나들이 여섯 있었는데, 맛있는 걸 챙겨주면서 예뻐해 주셨어요. 뭐 먹을 거 없나 싶어서 빠끔히 머리를 들이밀면, 할아버지가 그랬어요. '영걸이 왔니, 무눙이는 어찌 아이 왔니.'"

강산에의 본명은 강영걸이다. "'영웅호걸'이란 거창한 문장에서 따온 이름 때문에 창피했어요. 누나 이름은 더했어요. '무웅(武雄)'이었어요. 아버지가 북한에 두고 온 아이들의 이름이 웅자 돌림이어서 통일되면 아이들을 찾을 작정이셨던 거죠. 지금은 목사 사모님이 된 누나도 머슴애 같은 이름이 정말 창피했대요."

참 없이 살았던 어린 시절이었다. 엄마 일하는 직장 따라 집을 옮기느라 부산에서 초등학교만 세 곳을 다녔다. "소풍 가는 건 싫었어요. 어린 마음에 다른 아이들이 가져온 비닐 소풍 가방이 부러웠어요. 보자기를 어깨에 둘러메고 소풍 가는 건 정말 창피했어요."



'와그라노'(2002)-와그라노 니또 와그라노~/와그라노 니또 와그라노~/워우워워우와 그래싼노/뭐라 케산노 뭐라 케싼노니~/우짤라꼬이요 우짜라꼬내.

부곡중학교와 동래고등학교에 다닌 그는 서울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환상과 호기심으로 가득한 시절이었다. "교회 장로님이 하루는 신문 칼럼을 오려서 오셨어요. 한의대의 전망에 관한 칼럼이었어요. 그전엔 한의대가 있는지도 몰랐어요. 아버지가 한의학을 공부했다고 하지만, 일본에서 독학하셨다니. 경희대가 서울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거다 싶었어요."

대학의 환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1982년 경희대 한의과 1학년 1학기 중간고사 치르고는 그의 말처럼 '빵 날랐다'. 고작 2개월 학교 다니곤, 경기도 백마 '화사랑'이란 카페에서 세상 물정을 알아갔다. 서빙하다 우연히 통기타를 잡았다. 하나하나 배워가면서 통기타를 가지고 놀았다. 1983년 다시 1학년에 복학했지만, 이미 '맛있는 물'이 제대로 든 상황이라 학교는 재미없었다. '화사랑'으로 다시 돌아갔다.

'서울말'은 있어 보였다. 책을 크게 소리 내 읽으면서 서울말을 연습했다. 그에게 책은 내용보다는 스피치 훈련용이었다. 연기자 시험도 봤다.

한참 뒤 외국여행을 떠나 사막을 걷고 있을 때였다. "까마귀 한 마리가 자꾸 따라오는 거예요. 무심결에 까마귀에게 '니 와그라노'라는 말을 뱉었는데, 그 소리가 아주 예뻤어요. 스페인어처럼 들리기도 했어요. 이거 재밌네, 노래로 만들어보자 그랬어요."

사투리는 소리만으로도 매력적이었다. "이 언어를 왜 창피하다 했지. 깊은 침묵의 공간인 사막에선 경상도니, 전라도니, 서울이니, 하는 관념에 얽매이지 않아도 됐어요. 자유로워진 거지요."

오랫동안 그를 옭아맸던 것에서 해방감을 맛보았을 때의 통쾌함이었다.

'맛있는 물' 통기타에 푹 빠져 
재미없는 한의대 생활 2달 만에 끝
"잠자는 세포를 얼마나 깨우느냐… 
깨어 있는 만큼 인생의 맛을 본다"

'태극기'(1996)-나는 그래도 내가 만든 삐따기야/하지만 너는 우리가 만든 삐따기/바람이 부는대야 어쩔 수 없겠지만/절대로 삼풍(三風)은 또 불지 않았으면/이 비가 오는대야 어쩔 수 없겠지만/절대로 태우(太雨)는 또 오지 않았으면….

"'...라구요'는 엄마 이야기를 한 건데, 사회가 거창하게 해석한 거죠. 그래도 약간의 소명의식은 있었어요. 외국의 아티스트들은 사회적인 문제의식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한국엔 별로 없었어요, 왜 없지? 그러면 나라도 하자, 그랬어요."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노태우 비자금이 밝혀지면서 곪은 것들이 터져 나왔던 그 시절, 시청 앞에 삐딱하게 걸린 태극기에 감정이입을 해서 나온 노래가 '태극기'다.

1989년 일본에서 받은 문화적 충격도 컸다. "일본은 별천지였어요. 한국이 흑백이라면 일본은 컬러였어요. 북한 청년이 남한에 처음 온 것 같은 그런 엄청난 충격을 받곤, 그동안 살았던 청춘이 억울했어요. '내 청춘 돌리도' 하면서 삐딱함이 발동했어요." 기성세대에 대한 삐딱함과 동시에 일본에서의 경험은 세상을 크고 넓게 보는 눈도 줬다. "일본엔 참고할 인생이 너무 많았어요. 다양한 음악이 쏙쏙 들어왔어요. 아기처럼 그 음악을 흡수한 거죠. 식당에서 설거지해서 번 돈으로 숱한 공연을 보면서 나도 저 무대에 섰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기 위해선 내 음악이 있어야 했어요. 그렇게 만든 게 데뷔 앨범에 실린 여섯 곡이에요."

한국에 돌아와 앨범을 냈지만, 여전히 세상은 틀에 갇혀 있었다. 신인가수의 앨범을 받아든 방송사 PD들은 무슨 노래 제목이 이러냐고 타박했다. '...라구요' 앞에 붙은 '...'을 이해하지 못했다. 소속사에선 제목을 '모범스럽게' 바꾸자고 했다. '...라구요'가 '갈 수 없는 고향'이란 모범답안 같은 제목으로 바뀔 판이었다. 경제적인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그것만큼은 못 바꾸겠다고 버텼다. 그때 타협했으면, 지금의 강산에는 없었을 테다.

강산에는 인권콘서트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비롯해 사회적인 발언을 하는 무대에도 곧잘 올랐다.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공연이나 MBC 지키기 1만인 촛불문화제에도 참석했다. 그러면서 회의가 들었다. "평화주의자라 해도 그 표현을 어찌하느냐의 문제지요. 총칼 들고 평화 쟁취를 위해 싸울 건가? 평화를 외치면서 실은 얼마나 폭력적으로 될 수 있는지도 절감했어요. 그래서 좌파 우파 '그 어느 쪽도 아닌'이란 공연을 만들기도 했어요." 공연이 분노를 증폭시키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지난 1일 서울 이화여대 삼성홀에서 열린 강산에의 `합니다` 콘서트 현장. 레코드맛 제공
'넌 할 수 있어'(1994)-후회하고 있다면 깨끗이 잊어버려/가위로 오려낸 것처럼 다 지난 일이야/후회하지 않는다면 소중하게 간직해/언젠가 웃으며 말할 수 있을 때까지.

홍대 앞 연습실 이름이 '나비'다. '나비'는 강산에보다 두 살 어린 그의 일본인 아내 다카하시 미에코의 한국 이름이기도 하다. "하루는 와이프가 뜬금없이 한국 이름을 갖고 싶다고 했어요. 안 그래도 그때 나비에 꽂혀 있던 때라 '그럼 나비 해라' 그랬죠."

미에코는 일본의 음악학교에서 드럼을 공부하다 우연히 접한 사물놀이에 빠져 무작정 장구를 배우러 한국에 왔다. "87년쯤 백수로 지내며 신촌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아내를 만났어요. 결혼식은 않고, 91년에 혼인신고만 했어요."

1996년  '삐따기'란 세 번째 앨범을 내고 난 뒤 그는 많이 힘들었다. "김건모, 신성우랑 같은 대기실에 있어도 잘 못 어울렸어요. 인기가수가 됐지만, 명성과 반대로 속은 곪아 들어갔어요. 가요계 내부를 들여다보면서 회의도 들었어요." 개인적인 혼돈도 극에 달했다. 음주운전 사고에다 대마초로 잡혀가기도 했던 때였다. 도망치듯 외국으로 떠돌았다.

"혼돈 속에서 미국서 1년 동안 살 때, 아는 형 집에 있었어요.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 청소하려고 무심코 시디플레이어를 틀었는데, 내 노래가 나오는 거예요. 누군가 그 안에 시디를 넣어 둔 거예요. 그때 나온 노래가 '넌 할 수 있어'였어요. 사람들이 제 노래에 위안을 받는다고들 하던데, 그때까지도 잘 몰랐어요. 그런데 잊어버렸던 내 목소리를 듣는데, 사람들이 말한 게 이런 느낌이었구나 하고 힘이 났어요."

'넌 할 수 있어'는 그의 아내 미에코가 작사한 곡이다.  "1년 넘게 외국에서 방황하고 돌아왔을 때 아내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어요." 

 

'그날 아침'(2011)-그날 아침/그날 아침/그날 아침/당신 집앞.

"아티스트의 공통점은 늘 자신을 깨우는 거예요. 타성에 젖고 익숙한 것을 깨워야 해요. 순간 깨달았다고 깨어 있는 건 아니지요. 후배들 보면서 '아! 내가 저런 눈빛이 있었는데', 하는 영감을 얻어요."

'그날 아침'은 3호선 버터플라이의 기타리스트 성기완이 쓴 시에 붙인 노래다. '그날 아침'이란 가사만 28번 반복되다가 마지막은 '그날 아침 당신 집앞'으로 마무리하는 독특한 노래다.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은 시가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요즘 홍대에서 노는 그는 인디 후배들과도 잘 어울린다. 10년가량 소속했던 다음뮤직을 나와 지난해 인디레이블인 '레코드 맛'을 차렸다. "독립한 이유는 언제든지 떠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기획사의 틀을 벗어나 다양한 사람과 문화 속에서 나를 표현하고 싶다는 욕망이다.

"트렌드나 브랜드에서 자유로워서 좋아요. 세상엔 별 희한한 종자들이 다양하고 훌륭하게 살고 있어요. 얼마나 잠자는 세포를 깨우느냐가 관건이죠. 깨어 있는 만큼 인생의 맛을 보는 거죠."

'새로운 맛'을 찾아 올해는 보폭을 넓힐 작정이다. "10월에는 제대로 된 20주년 콘서트를 열 계획이고요, 12월 5일엔 프랑스 파리에서 공연할 거예요. 유럽 페스티벌도 기획하고 있고, 몇 번 작업을 함께한 전수일 감독과 음악 영화도 찍을 거예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그가 던진 말이 머리에 박혔다. "'인생 뭐 있어?'라는 말이 있어요. 힘드니까 위로한답시고 하는 말이겠지만, 같은 문장인데도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꾸고 악센트를 다르게 하면 전혀 다른 의미가 돼요. '인생 뭐 있어!'"

오는 12일 오후 7시 30분 경남 거제문화예술회관 대극장에서 '프리 뮤직 페스티벌'이란 이름으로 무대에 선다. 그가 태어난 곳에서 여는 공연이다.

 이상헌 기자 ttong@busan.com

산에가  말하는 나

하얀 빤스를 싫어하는 나. 머리를 긁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나. 술은 끝까지 마셔야만 직성이 풀리는 나. 유혹에 바로 넘어가는 나. 개나 고양이를 보면 키우고 싶은 나. 똑같은 영화를 몇 번이고 즐길 수 있는 나. 축구화 신고 오락축구 하는 나. 담배를 수백 번이나 끊고 있는 나. 노래 가사 외우기가 힘든 나. 분위기가 뜰 때까지 노래하는 나. 마틴 기타를 부숴버렸던 나. 터무니없이 가끔 식구들을 놀라게 하는 나. 계산할 수 없는 나. 아침에 일어나면 재채기부터 하는 나. 소화가 잘 안 되는 나. 가야 되나? 하면서 일단 나가면 안 돌아오는 나. 아이스크림 먹다 비행기 놓치는 나. .....ㅎㅎ 모두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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