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가 열전] 35. 한국 록의 대부 전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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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효에서 위로로… 세상의 상처 품는 한국 최고 록보컬

시대의 비명에 응답해 온 한국 록의 대부 전인권. 음악 인생의 '2막 1장'을 시작한 그는 상처받은 이들과 세상을 끌어안으며 동시대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페이퍼 크리에이티브 제공

지난 19일 서울 광화문, 세계에서 가장 폼 나는 촛불집회 현장에서는 일상을 빼앗기고 길가에 버려진 60여만 명이 제창으로 '아무 걱정 하지 말라고…' '우리 아픈 기억들 모두 가슴 깊이 묻어 버리자고…' 켜켜이 쌓인 상처와 분노를 노래로 다독여 주고 있었다. 이렇듯 시대의 비명(悲鳴)에 응답하는 이가 바로 전인권이었다. 31년 전 발표한 '들국화 1집'(1985)으로 한국 대중음악의 르네상스기를 견인한 '들국화'의 핵심 전인권. 그의 보컬은 마음에 한번 착색되면 지우지 못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말이다.

1979년 '따로 또 같이' 1집 참여
포크록 들고 가요계 공식 입성
들국화 1집서 마력의 목소리 폭발
한국 대중음악사 이정표 우뚝

들국화 해체 후 솔로앨범 발표
잇단 대마초 사건 파란만장한 삶
2014년 '전인권 밴드'로 재기
촛불집회 등 시대의 비명에 응답

■시대의 비명에 응답하라

1954년 서울 태생인 그는 인쇄소를 경영하던 유복한 집안의 삼형제 중 막내로 자랐다. 부친의 분가와 큰형의 가출로 어머니, 작은 형과 함께 학창 시절을 보낸다. 공부보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전인권은 명지고 1학년 때 규율부 학생들과 싸운 뒤 그 길로 자퇴한다. 스케치북과 색연필, 라디오를 들고 충남 태안군 만리포 바닷가로 향한 그는 비틀즈의 'Hey Jude'와 존 레넌의 'Imagine'을 듣고 영감을 받아 열여덟이 되던 해 음악을 하기로 한다. 영문학과에 다니던 작은 형 덕분에 팝송을 많이 접했던 전인권은 집 근처 서울 종로구 삼청공원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다 입소문을 타기 시작해 팬이 생기기 시작했다.

20대 초반, 자신이 서야 할 무대에 대한 고민은 서울 삼청공원, 명동 쉘부르를 거쳐 부산 극동호텔 나이트클럽 등 전국 방방곡곡으로 이어졌다. 이윽고 1979년, 그간의 언더그라운드 활동을 청산하고 이주원·강인원·나동민과 함께 그룹 '따로 또 같이'를 결성해 '따로 또 같이 1집'(1979)으로 가요계에 입성한다. 한국 포크 록 역사의 이정표를 세운 이 앨범에는 전인권의 트레이드마크인 웅혼한 보컬 카리스마까지는 아니지만 너울거리는 민요적 그루브가 이미 틀을 잡고 있다. 전인권, 나아가 '들국화'의 음악적인 뿌리가 로큰롤뿐만 아니라 포크 음악에도 닿아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하지만 전인권은 자신의 음악 성향과는 맞지 않는다고 판단, 같은 해 비공식 솔로 앨범 '어찌 사랑 너뿐이랴'(1979)를 발표했다. 이듬해 '따로 또 같이' 시절의 데뷔곡 '맴도는 얼굴'을 머리 곡으로 두 번째 비공식 솔로 앨범 '맴도는 얼굴'(1980)도 내놓지만 대중은 철저히 외면했다. 1981년, 전인권은 '전인권과 함춘호'를 결성해 어쿠스틱 기타와 록을 접목한 음악을 들려주며 다운타운가에서 이름을 알렸다. 그즈음 함춘호의 소개로 만난 허성욱(키보드)·조덕환(기타)·한춘근(드럼)과 함께 '동방의 빛'이란 밴드로 강원도 강릉시의 한 디스코텍에서 활동했지만, 허성욱의 부모가 찾아와 팀을 해체하고 만다. 1982년에는 허성욱과 함께 다시 통기타 업소인 서울 이촌동 '가스등', 이대 앞 '카페 모노'에서 음악을 한다. 이때 최성원을 만나 셋이서 의기투합, '전인권 트리오'와 '블루 스카이'란 그룹을 거쳐 기타리스트 조덕환이 합류한 뒤부터는 '들국화'라는 공식 명칭을 사용하기에 이른다.

조덕환이 가세해 1집 라인업을 완성하면서 1985년 9월, 역사적인 데뷔 앨범 '들국화 1집'(1985)을 발표한다. 화려한 '들국화'의 라인업은 전인권(보컬·기타), 최성원(기타·베이스), 조덕환(기타·보컬), 허성욱(키보드), 그리고 세션으로 최구희(기타), 주찬권(드럼), 이원재(클라리넷) 등이다. 그동안 '들국화'의 곡들은 드럼 분야가 없었기 때문에 포크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지만, 앨범 녹음 과정에서 드럼과 전자기타 세션이 추가돼 이전보다 록 이미지가 훨씬 강화됐다. 야성적이고 독창적이면서 아방가르드한 전인권의 보컬은 '들국화'를 완전무결하게 해주는 화룡점정이었다. '들국화 1집'에서 보여준 록, 포크, 블루스, 퓨전 등 다양한 실험과 거의 완벽함에 가까운 창작·연주력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했다. 80만 장의 음반 판매량을 기록했고, 소극장 콘서트는 연일 매진됐다. 이는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에 비견할 만한 사회적인 충격파였다.

■시들어도 다시 피어나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1집 이후 '들국화'는 더는 타오르지 않았다. 한반도의 지축을 뒤흔든 1집에 비해 이듬해에 나온 '들국화 2집'(1986)은 기운이 빠져 있었다. 전인권은 말했다. "노래가 나오지 않았다. 내가 부를 곡이 없었다"고. 결국 '들국화'는 단 두 장의 음반만을 남긴 채 해체했고, 멤버들은 각자의 길을 걷는다.

당연히 가장 큰 관심은 전인권의 다음 행보였다. 전인권은 허성욱과 함께 들국화의 위대함을 재천명한 앨범 '1979~1987 추억 들국화 머리에 꽃을'(1987)을 발표한다. 이들 외에도 최구희(기타), 최성원(베이스), 주찬권(드럼) 등 멤버들이 모두 참여한 이 음반을 가리켜 '들국화'의 마지막 혼을 담은 실질적인 '들국화 3집'이라고도 한다.

따로 또 같이 1집, 전인권 비공식 솔로 1집, 들국화 1집, 전인권 공식 솔로 1집 음반(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그해 10월 '들국화' 멤버 4명과 '사랑과 평화' 이철호가 함께 대마초 사건으로 구속되지만, 이듬해 5월 전인권은 여전히 한국 록의 절대 강자임을 만천하에 알린 명반 '전인권'(1988)을 발표한다. 그는 이 앨범을 '들국화' 이전 발매한 두 장의 비공식 솔로 앨범에 이은 통산 3집이 아닌 들국화 해체 후의 진정한 솔로 1집이라고 역설한다. 작·편곡 능력은 한층 심화했고, 불가사의한 가창력도 여전했다. 더불어 김효국(키보드)·오승은(베이스)·박기형(드럼)으로 구성된 그의 백밴드 '파랑새'의 연주 역시 무결점 사운드를 뽑아내고 있었다.

전인권은 1989년부터 자신의 밴드 '가야'를 이끌고 자신의 음악적 지향이 결코 단색이 아님을 알리는 솔로 2집 '지금까지 또 이제부터 II'(1989)를 발표한다. 수록곡 '언제나 영화처럼'은 그의 파란만장한 삶의 부침을 예고하는 듯했다. 1991년 대마초 사건 이후 1995년에는 새로운 멤버들과 함께 러닝타임이 무려 67분(총 13트랙)에 달하는 컴백 앨범 '들국화 3집'(1995)을 내놓으며 옛 영광을 재건하려고 노력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대마초와 히로뽕 투약 사건으로 오랜 기간 음악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데뷔 30주년을 맞은 2003년에는 2집 이후 14년 만에 음반과 사진집을 엮어 솔로 3집 '다시 이제부터'(2003)를 발표한다. '인권이 라이프'란 유행어를 탄생시킨 TV CF를 찍으며, 영화 '몽중인'(2002)과 '안녕! UFO'(2004) 등에도 출연했다. 2004년에는 '걱정 말아요 그대'와 '사랑한 후에'를 강렬한 록으로 재편곡해 수록한 솔로 4집 '전인권과 안 싸우는 사람들'(2004)을 발표한다. 그러나 2007년 또다시 마약 사건으로 1년여간 복역한다. 이후 2012년 최성원·주찬권과 '들국화'를 재결성해 전국 투어, 록페스티벌 참가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지만 2013년 10월 주찬권 영면 이후 '들국화' 활동은 중단됐다. 같은 해 12월 고(故) 주찬권의 유작 앨범이 된 신작 '들국화'(2013)를 발표해 대중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으며 유의미한 동행에 마침표를 찍는다. 그러고는 다음 해 가을, 의미심장한 제목인 '2막 1장'(2014)이란 앨범과 함께 '전인권 밴드'로 다시 대중 앞에 섰다.

유독 많은 부침을 겪었지만 늘 긍정적인 힘과 열정을 발산해 온 전인권은 이제 저항보다는 한 단계 승화된 모습으로 세상을 끌어안으려는 듯하다. 그의 소싯적 풍부한 음영(陰影)과 역동적인 보컬보다, 지금의 그가 아니면 소화하고 만들어 낼 수 없는 깊은 울림이 시나브로 좋아지는 것은 필자뿐만이 아닐 것이다.

최성철·페이퍼 크리에이티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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