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희와 함께 읽는 우리 시대 문화풍경] 적대의 시대, 공감을 위한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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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대학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협동과정 강사

들라크루아의 ‘격노한 메데이아’(1862)는 메데이아가 어린 두 아들을 죽이려는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사랑을 위해 기꺼이 헌신한 메데이아의 비극적 운명을 포착한 화가의 문학적 상상력이 돋보인다. 메데이아가 남편 이아손의 새 여자를 죽이고 자식마저 살해한 까닭은 물론 복수다. 그녀가 광기와 잔혹함, 마녀의 대명사로 회자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스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는 메데이아의 입장에서 사랑과 복수의 서사를 그렸다. 그녀는 남편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도 오롯이 사랑했던 이가 실은 가장 비열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은 그녀의 삶 전체를 송두리째 파탄으로 내몰았다.

이아손도 만만치 않다. 메데이아의 헌신에도 왕위에 오르지 못한 그에게 코린토스 왕 크레온의 딸과 결혼은 대단한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아이들에게도 더 나은 삶을 보장할 수 있는 길이었다. 이른바 정략결혼이다. 그는 분노에 휩싸여 잔혹성을 드러낸 메데이아를 튀르세니아 바위 언덕의 스퀼라보다 잔악한 괴물이라 악담을 퍼붓는다. 메데이아는 교묘한 말재주로 불의를 덮으려 한다며 이아손의 심장에 꽂힌 비수는 인과응보라 말한다. 분노와 증오에 휩싸인 두 사람이 끝내 가혹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었던 것 또한 지독한 운명이다.

팽팽하게 맞서는 두 사람 사이에 공감의 물꼬를 트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신을 되돌아보기보다는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상대의 입장이나 진심을 헤아리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갈등은 개인을 넘어 집단이나 지역, 국가 차원으로 확대될 수 있다. 갈등의 원인이 복합적인 것은 물론이고, 공감을 파괴하는 반작용도 조직적이다. 공감하는 세상을 위한 '투쟁'을 불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교수 자밀 자키는 분노에 사로잡혀 공감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상태를 감정적 본능으로 본다. 여기에 굴복하면 서로에게 더 큰 고통을 남길 뿐이지만, 어떤 감정으로 나아갈 것인가를 결정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달라질 수 있다고 한다. 공감은 반사작용이기 때문이다. 자밀 자키는 메데이아와 이아손만큼이나 갈등이 깊은 부모를 오가며, 그들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졌을 때도 두 분 모두와 연결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얻은 교훈이 있다. 두 개인의 경험이 서로 극단적으로 다를 때에도 양쪽의 경험이 모두 진실하고 심오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다. 적대와 분노에 기반한 지방선거가 끝난 우리의 정치 현실에도 이러한 가치가 환하게 가닿았으면 좋겠다. 공감은 친절의 밑바탕이며, 친절은 공감의 직접적인 결과다. 친절함이란 경직된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기술이라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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