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 담은 순곡주 ‘대담’…상쾌하거나 달콤하거나 [술도락 맛홀릭] <14>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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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대밭고을 ‘대담13’(탁주) ‘대담15’(약주)
대나무 항균 기능이 잡내 없애고 숙성 도와
첨가물 없이 쌀로만 빚어 입안 가득 ‘건강미’

대밭고을 강태욱 대표가 5년간의 연구 끝에 출시한 탁주 ‘대담13’과 약주 ‘대담15’. 푸른 대나무의 맑고 건강한 기운이 느껴진다. 대밭고을 제공 대밭고을 강태욱 대표가 5년간의 연구 끝에 출시한 탁주 ‘대담13’과 약주 ‘대담15’. 푸른 대나무의 맑고 건강한 기운이 느껴진다. 대밭고을 제공

가가호호 술을 빚던 시절이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라졌던 가양주(家釀酒) 문화가 100년 만에 다시 부활하고 있다. 현재까지 발급된 지역특산주 면허만 1400건에 이르고, 해마다 새로운 양조장과 전통주가 탄생한다.

전통주엔 지역의 특색이 오롯이 담겼다. 지역에서 나는 재료로 술을 빚어, 특산음식과도 잘 어울린다. <부산일보>는 ‘술도락 맛홀릭’ 기획시리즈를 통해 부산·울산·경남 지역의 전통주 양조장을 탐방하고, 지역의 맛과 가치를 재조명한다. 이지민 대동여주도 대표 등 전통주 전문가도 힘을 보탠다.

고결한 군자에 비유해 옛 선조들이 시와 그림의 소재로 삼은 사군자. ‘매란국죽’ 중에서도 대나무는 가장 먼저 역사기록에 등장할 정도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사시사철 푸르른 대숲을 마주하면 강인하면서 담백하고, 맑고도 건강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 느낌을 온전히 술맛에 담아내는 양조장이 있다. 손수 일군 대나무 잎과 수액이 술의 재료다. ‘대나무를 가꾸는 게 지구를 살리는 길’이라는 신념을 가진 한 양조인을 만나러 경남 사천시로 향했다.

■ 체험마을 촌장에서 양조인으로

사천시 곤양면 서정리의 한 마을. 뒷산에 울창한 대밭이 펼쳐진다. 숲속으로 몇 걸음 옮기자 듬성등섬 큼지막한 대나무 밑동이 베어진 채, 비닐 파우치가 씌워져 있다. 막바지 대나무 수액을 받는 현장이다.

“대나무 수액은 5월부터 7월 중순까지 채취합니다. 대나무의 적은 대나무라서 적절히 간벌을 해줘야 해요. 한 평에 한 그루 정도씩 베어 내 수액을 채취하면 자연스럽게 간벌도 돼요. 거기다 건강한 대나무숲은 일반 나무 3배 이상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니 일석삼조인 셈이죠.”

대밭고을 강태욱(56) 대표는 취재진과 만나자마자 대나무의 장점에 대해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의 각별한 대나무 사랑엔 ‘오랜 이유’가 있다. 1998년 IMF 사태로 직장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왔을 때, 10만 평의 대나무밭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평생 농민운동에 헌신한 아버지가 수십 년 동안 마을 사람들과 함께 일군 대밭이었다.

대나무를 활용해 일을 해 보면 어떻겠냐는 아버지의 말씀에 강 대표는 수액을 떠올렸다. “당시엔 주로 일본에 대나무 수액이 있었고, 국내에는 거의 없었습니다. 외할아버지께서 수액을 받아 드시던 게 생각나 안정적으로 대나무 수액을 채취하는 방법을 연구했죠. 무더운 여름철엔 하루만 지나도 상해버리거든요.”

대나무 수액을 채취하는 모습. 강 대표는 20여 년 전 ‘대나무 수액 상온 장기 보관법’을 개발했다. 대나무 수액을 채취하는 모습. 강 대표는 20여 년 전 ‘대나무 수액 상온 장기 보관법’을 개발했다.
대밭고을 강태욱 대표가 양조장의 역사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대밭고을 강태욱 대표가 양조장의 역사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강 대표는 경상남도농업기술원과 함께 대나무 수액을 1년 내내 먹을 수 있는 ‘상온 장기 보관법’을 개발했고, 특허도 출원했다. 우연히 TV 프로그램 ‘6시 내고향’에 소개되면서 수액을 찾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강 대표는 이들을 그냥 돌려보내기 미안해 대숲 산책코스 등을 개발했고, 2002년 ‘비봉내마을’이란 체험마을로 거듭났다. 당시로선 흔치 않은 농촌 관광의 시작이다.

강 대표가 본격적으로 대나무 술을 연구하기 시작한 건 2018년,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2021년 봄 지역특산주 면허를 받았지만 첫 번째 술(탁주)은 지난해 가을에서야 출시됐다. 체험마을 촌장에서 양조인으로, 뒤늦게 우리 술에 빠져든 이유는 뭘까. 대나무를 담았다는 뜻의 술 이름 ‘대담’에는 대나무와 술의 만남, 그 이상의 가치가 담겨 있다.

대밭고을 양조장 건물 입구에 놓인 전통 항아리 뒤로 짙푸른 맹종죽 대밭이 우거졌다. 대밭고을 양조장 건물 입구에 놓인 전통 항아리 뒤로 짙푸른 맹종죽 대밭이 우거졌다.
대밭고을의 대표술인 ‘대담15’(왼쪽)와 ‘대담13’. 강 대표는 전통 항아리로 200독 가량 술을 빚은 끝에 술맛을 완성했다. 대밭고을의 대표술인 ‘대담15’(왼쪽)와 ‘대담13’. 강 대표는 전통 항아리로 200독 가량 술을 빚은 끝에 술맛을 완성했다.

■ 대나무잎과 수액, 200독의 술 빚기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은 강 대표는 대나무에 진심이었다. 정성스레 수액을 받고 죽순을 캤다. 2007년엔 영농조합법인(대밭고을)을 만들어 댓잎차를 생산하기도 했다. 이어 대나무 수액 고추장, 대나무 숯 등 다양한 제품 개발을 시도하다 그만 폭발 사고를 당했다. 큰 부상을 입은 데다 체험마을 방문객도 줄면서 강 대표는 가족과 함께 해외로 떠났다. 그러다 2018년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대나무밭으로 돌아왔다.

“남은 삶을 덤이라고 생각하니, 예전의 생각이 많이 바뀌더라고요. 사고 전까진 돈을 벌기 위해서 대나무 일을 했다면, 이후엔 이 대나무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죠.”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하며 품은 고민의 해답을 강 대표는 전통주에서 찾았다. 우리 술을 빚기 시작한 결정적인 계기는 그가 스스럼없이 두 번째 아버지라 부르는 분 때문이다. 대나무 수액을 연구할 때 도움을 줬고, 이후 경남도농업기술원장까지 지낸 이상대 박사다. 한국으로 돌아온 강 대표는 “수액으로 술을 만들고, 관련 공부도 하라”는 20년 전 이 박사의 조언을 떠올렸다. 서울과 사천을 오가며 대학원에서 전통주 공부(양조학)에 매진했고, 여러 곳의 전문교육기관에서 술 빚기를 배웠다.

대밭고을 양조장 건물. 당초 대잎차를 생산하기 위해 지은 건물인데, 교육 공간을 겸한 양조장으로 쓰고 있다. 대밭고을 양조장 건물. 당초 대잎차를 생산하기 위해 지은 건물인데, 교육 공간을 겸한 양조장으로 쓰고 있다.
강 대표의 사무실에서 수 년째 익어가는 죽순주. 강 대표의 사무실에서 수 년째 익어가는 죽순주.

“한 달에 열 독(항아리)씩, 3년 동안 200독 넘게 빚은 것 같아요. 항아리를 많이도 깨먹었죠. 이 정도 술맛이면 되겠다 싶어 양조장을 차렸는데, 200L짜리 대용량 통을 쓰니까 술이 다 망해버리는 거예요. 술을 빚고 내버리기를 반복하며 또 1년여를 허비했죠.”

5년간의 공부와 연구·실험 끝에 탄생한 ‘대담’은 세 번 빚는 삼양주다. 범벅과 누룩을 혼합한 밑술을 36시간 발효하고, 다시 죽으로 덧술을 해 24시간, 마지막으로 고두밥을 섞어 48시간 더 발효시킨다. 단계별 발효 사이에 하루이틀 급속냉각을 하는 게 특징이다. 마지막 저온 숙성 단계에서는 대나무잎을 넣는다. 대나무의 항균력이 잡냄새를 잡아 주고 숙성을 돕는다는 게 강 대표의 설명이다. 약주는 탁주를 걸러 6개월 더 숙성한다. 한 병의 술이 나오기까지 탁주 ‘대담13’은 3개월, 약주인 ‘대담15’는 9개월의 기다림이 필요하다.

대밭고을 주변 싱그러운 대밭. 대밭고을은 사천시 곤양면 일대 10만 평의 대나무숲을 관리하며 수액·죽순을 채취하고, 술도 빚는다. 대밭고을 주변 싱그러운 대밭. 대밭고을은 사천시 곤양면 일대 10만 평의 대나무숲을 관리하며 수액·죽순을 채취하고, 술도 빚는다.
강 대표가 우리 술학교를 열어 지역 주민들에게 전통주 빚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강 대표가 우리 술학교를 열어 지역 주민들에게 전통주 빚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 덤으로 더불어 사는 ‘술 익는 마을’

대나무의 기운이 담겨서일까. 대담13을 한 모금 가져가자 텁텁함 대신 입안 가득 상쾌함이 감돈다. 대담15는 달콤한 향미가 돋보인다. 인공 첨가물 없이 쌀의 힘만으로 만들어 낸 순곡주의 건강한 단맛이다.

“쌀과 물, 누룩만 쓴 순곡주여야 정상적으로 빚은 술이라 생각합니다. 저희 술은 쌀의 전분을 99% 이상 완전히 발효시키기 때문에 탄산이 전혀 없고, 누룩 함량이 일반 막걸리보다 적은 6% 정도라 누룩취도 거의 나지 않습니다.”

대담과 곁들일 만한 추천 음식으로 강 대표는 크래커류와 해산물을 꼽는다. 곤양터미널 인근 식당 ‘덕원각’에서는 다양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다. 20년 가까이 식당을 운영해 온 주인장이 매일 새벽 삼천포 수산시장에서 해산물을 공수해 온다. 대표메뉴인 ‘곤양군수밥상’은 키조개를 비롯한 각종 조개류와 회·문어·전복·소라·멍게·새우·생선구이 등 상차림이 푸짐하다. 해산물은 크기부터 압도하는데, 지역에서 나는 제철 음식의 싱싱함에 대담의 깔끔함이 잘 어우러진다.

2년 동안 발효·숙성·증류 과정을 거쳐야 맛볼 수 있는 ‘담53’. 물 대신 대나무 수액으로 빚는다. 2년 동안 발효·숙성·증류 과정을 거쳐야 맛볼 수 있는 ‘담53’. 물 대신 대나무 수액으로 빚는다.
대밭고을의 술이 저온 창고에서 숙성되고 있다. 대밭고을의 술이 저온 창고에서 숙성되고 있다.

강 대표는 이달 중 증류주 ‘담53’도 정식 출시할 계획이다. 물 대신 대나무 수액으로 빚은 약주를 1년 더 숙성시켜 전통 소줏고리로 증류한 술이다. 대나무 3000그루에서만 받은 수액이어서 단 300병 한정이다. 최근 서울에서 열린 국제주류박람회에 선을 보여 전통주 전문가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강 대표는 지난해 여름부터 지역민을 대상으로 술 빚기 교육도 진행하고 있다. 산림복지진흥원과 연계해 ‘우리술 학교’를 열었는데, 입소문이 나면서 올해는 국립경상대 평생교육원에 강좌가 개설됐다. 지금까지 강 대표가 가르친 교육생만 100명 정도. 하반기에는 중급반을 운영할 계획이다.

“지역에서 전통주를 제대로 배우려면 서울로 올라가야 해요. 지역에도 전통주 문화가 있어야 하잖아요. 언젠가는 지역 농산물로 술을 빚는 건강한 먹거리 문화가 생길 거란 생각으로, 술 교육을 통해 그 밑거름을 닦으려고 합니다.”

강 대표의 더 큰 꿈은 ‘술 익는 마을’을 조성하는 것이다. 공유형 양조장을 만들어 지역 양조인을 키워 내면, 이들이 하나둘 주변에 양조장을 차리고, 마을 전체가 술 익는 내음으로 가득 차는 그림이다. 대밭고을은 올봄 고용노동부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았다. 덤으로 사는 인생을 지역 주민과 함께하겠다는 강 대표의 다짐이 조금씩 익어 가고 있다.

글·사진=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덕원각의 '곤양군수밥상'. 크고 신선한 제철 해산물로 가득한 상차림이다. 덕원각의 '곤양군수밥상'. 크고 신선한 제철 해산물로 가득한 상차림이다.

[기자들의 시음평]

▶김희돈 스포츠라이프부 부장

(대담13) “뒷맛에서 알코올 기운이 확 올라온다. 담백하고 깔끔하다. 이름을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대담15) “와인향에 더해 상큼하면서도 묵직한 약초향과 풀향이 난다. 깔끔한 해산물과 잘 어울릴 듯.”

▶김동우 편집파트 기자

(대담13) “진하지만 무겁거나 부담스럽지 않고 단맛이 감돈다. 매운 음식하고 잘 어울릴 것 같다.”

(대담15) “와인향이 나서 새콤함을 예상했는데 아니다. 막걸리보다 더 달다. 약주에 한 표를 주고 싶다.”

▶김보경 디지털미디어부 PD

(대담13) “처음엔 알코올의 센 맛이, 끝에선 산뜻한 풀 내음이 난다. 깔끔한 막걸리 애호가에게 추천.”

(대담15) “향은 스파클링 와인 같은데, 탄산 없는 단맛이라 금방 물릴 수도… 막걸리가 좀 더 낫다.”

▶이지민 디지털미디어부 에디터

(대담13) “깔끔하고 마지막엔 향긋함이 감돈다. 진하지만 걸쭉하게 남는 게 없어 가볍게 즐길 만하다.”

(대담15) “일반적인 약주 같지 않고 달달해 진입장벽이 낮을 것 같다. 짭쪼름한 음식과 잘 어울릴 듯.”

[전문가의 맛 코멘트]

▶이지민 대동여주도 대표

대담13 “잔에서 부드러운 곡향과 단향이 살포시 피어오르며, 뒤이어 요구르트향과 가벼운 풀향, 청포도향 등이 나타난다. 향처럼 맛도 편한 느낌의 막걸리라는 생각에 망설임 없이 잔을 들이켜게 되지만, 담백하면서도 산뜻함이 다가오다 뒤에서 느껴지는 쓴맛에서 알코올 도수가 느껴진다.”

대담15 “약간 불투명한 느낌의 라이트 골드 컬러의 약주다. 탁주보다 농밀한 향이 느껴지는데, 크리미하면서 단향도 좀 더 진하다. 적당한 곡물의 단맛과 함께 약간의 새콤함과 조금 강렬한 쓴맛이 자리 잡고 있다. 매콤하게 양념해 숯불에 구워 낸 돼지고기로 채소쌈을 크게 싸서 같이 먹고 싶다.”

-제품명 : 대담13(탁주) / 대담15(약주)

-양조장 : 대밭고을(경남 사천시)

-내용량 : 500mL

-알코올 : 13.0% / 15.0%

-원재료 : 정제수·쌀·누룩·대잎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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