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단상] 답정너, 잘못한 이는 이미 정해져 있다

김백상 기자 k10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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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상 사회부 차장

미국 스탠퍼드대학에 ‘리 로스’라는 저명한 심리학자가 있었다. 인간의 비논리성을 보여주는 실험을 많이 했는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안’에 대한 시민 평가 실험이 유명하다. 두 나라 시민에게 각 나라가 제시한 평화안들을 보여주고, 정책 평가를 실시했다. 다만 평화안의 국가명이 반대였다. 이스라엘의 제안을 팔레스타인의 평화안이라고 속이는 방식이었다.

결과는 예상대로다. 이스라엘 시민은 이스라엘 제안이라고 소개된 팔레스타인 평화안을 선호했고, 팔레스타인 시민도 이름만 팔레스타인 평화안인 이스라엘 제안을 지지했다. 자신이 속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이런저런 사실을 가져와 엉뚱한 선택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다. 이미 정해진 답에 뒤늦게 이유를 꿰맞춘 셈이다.

어려운 심리학 이론을 굳이 꺼내지 않아도, 실험 대상자의 행동 이유는 짐작할 수 있다. 두 나라의 갈등이 너무 커, 시민들은 상대 국가가 무조건 틀렸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어느 나라의 제안이라고 소개되는 순간, 실제 내용과 상관없이 머릿속에 이미 답은 정해진다. 그리고 그 결론에 맞는 이유를 찾기 시작한다.

리 로스의 실험 결과가 뻔한 것처럼 느껴지는 건, 그런 일을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안에서도 어느 당을 좋아하느냐에 따라 무조건 정부 정책에 찬반 의견을 정하는 이들이 많다. 누가 나오든 선거에서 1번 혹은 2번을 미리 정하는 유권자도 많다. 그들에겐 각자의 답이 오래전부터 이미 정해져 있다.

답을 미리 정해 놓고 너는 따르라고 요구하는 화법을 ‘답정너’라고 부른다. 답정너가 국가 간 논쟁이나 정치적 판단에서만 등장하는 건 아니다. 일상의 많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선입견에 의존하고, 실체를 보기 전 미리 답이 정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실제 다수 남자에게 페미니스트의 주장은 일단 허무맹랑하게 들리기 십상이다. 지역감정이 한창일 때는 출신 지역에 따라 같은 행동에 대한 평가를 달라지기도 했다. 자기가 속한 집단은 옳고, 상대 집단은 틀렸다고 판단하려는 경향은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 것이기도 하다.

요즘같이 SNS 등으로 통일된 여론이 급속히 확산하는 때는 ‘군중심리’가 위력을 지닌다. 무슨 일이 터졌다고 하면, 곧 여론 재판이 시작되고, 우리는 이미 누가 악인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확신을 하고 뉴스를 들여다보게 된다.

학생 인권이 강조되던 때엔 교사의 갑질 고발이 온라인에 올라오는 것만으로 교사는 사실상 부적격자가 됐다. 현장의 어려움에 대한 교사의 하소연은 팔자 좋은 교육 공무원의 변명으로 취급됐다. 지금은 교내 일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만으로, 학생의 인권과 자율성 보장을 요구하는 것만으로, 불량 학생과 학부모가 되는 분위기다. 대상만 바뀌었을 뿐 잘못한 사람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건 변함이 없다.

학교 안의 일이든, 국가 간 일이든, 세상만사는 똑같이 반복되지 않는다. 매번 옳고 그름이 다를 수 있다. 이걸 무시하고 성급하게 누군가를 욕하거나 편을 들어주면, 답정너의 운명을 피하기 어렵다.


김백상 기자 k10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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