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신비도, 가야 문명도 모두 품은 ‘이곳’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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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고장' 합천]
5만 년 전 운석충돌 ‘적중초계분지’
다라국 꽃피운 구슬밭 ‘옥전고분군’

대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합천운석충돌구. 5만 년 전 운석이 떨어지면서 적중초계분지가 만들어졌다. 대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합천운석충돌구. 5만 년 전 운석이 떨어지면서 적중초계분지가 만들어졌다.

경남 합천군에서 올해 반가운 이야기 2가지 들려왔다. ‘합천운석충돌구’를 세계적인 관광자원으로 육성한다는 소식과 가야고분군 7곳 중 하나인 옥전고분군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이다. 5만 년 전 우주의 비밀이 닿은 운석충돌구와 찬란한 가야 문명의 터전인 옥전고분군. 시공을 초월해 신비로움을 전하는 두 장소에 다녀왔다.

■ 운석이 지구와 만난 자리 ‘분지’

경남의 여러 고장 중에서 합천군은 부산에서 가까운 편은 아니다. 함안군과 창녕군을 지나치는 동안 아름다운 풍광이 운전의 지루함을 덜어 준다. 창녕군 유어면에서 우포늪 표지판의 유혹을 떨치고 곧장 낙동강을 건넌다. 적포삼거리에 이르자 도로변에 합천군의 문화재·명소를 소개하는 갈색표지판이 빼곡하다.

표지판엔 없는 운석충돌구로 가기 위해 낙동강변을 달린다. 초가을 낙동강의 고즈넉한 물길에 시선이 빼앗긴다. 청덕면을 지나 적중면 초입에 들어서자 아늑하면서도 드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적중초계분지이다. 들판 속으로 더 깊숙이 초계면으로 나아간다. 분지의 북쪽, 초계리에서 바라본 지형은 일반인이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다. 동서남북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채 옆으로 넓적한 타원형 들판이 펼쳐졌다.

초계면과 적중면에 걸친 지름 7km의 적중초계분지는 5만 년 전 운석이 충돌하면서 생긴 지형이다. 2020년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이 지하 암석구조를 분석해 운석 충돌의 직접 증거를 국제학술지에 발표하면서 운석충돌구임을 공식화했다.

적중초계분지 들판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도로. 적중초계분지 들판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도로.
원당마을 입구에 다다르자 오른쪽에 합천운석충돌구 전망대 표지판이 보인다. 원당마을 입구에 다다르자 오른쪽에 합천운석충돌구 전망대 표지판이 보인다.
구불구불한 콘크리트 도로를 10여 분 올라가면 정상 아래에 조성된 주차장이 나타난다. 구불구불한 콘크리트 도로를 10여 분 올라가면 정상 아래에 조성된 주차장이 나타난다.

운석이 충돌하면서 만들어 낸 지형을 제대로 조망하려면 분지의 서쪽 대암산 정상(합천운석충돌구 전망대)이 최적이다. 초계리에서 들판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남쪽으로 차를 달린다. 원당마을 입구에 다다르면 전망대까지 5.2km 남았다는 표지판이 나타난다. 마을에서 정상까지 10분 남짓 올라가야 하는 길은 콘크리트 포장이다. 차선이 없어 2차선 도로보다 좁지만 양방향 교행은 가능한 정도다. 경사가 높지 않은 대신 등고선을 따라 커브길이 심해 운전에 유의해야 한다.

숲속으로 접어드니 완연한 가을이다. 길 한가운데에 잘 익은 밤송이가 가득 떨어져 있어 차량으로 밟고 지나가기 미안할 정도다. 정상을 600m가량 앞두고 널널한 공터에 주차장이 마련돼 있다. 정상에 오르는 기분을 느끼기 위해 남은 구간은 걷기로 한다. 운석충돌구와의 만남을 생각하니 남은 길이 더 신비롭게 다가온다. 낯익은 구상나무와 초록 이끼 옷을 입은 수풀들. 길바닥에도 오래 전부터 자리잡은 듯한 이끼가 연둣빛 페인트를 칠한 듯 빛난다. 10분쯤 걸었을까. 드디어 끝이 보인다. 산 정상의 철탑 곁으로 대암산 표석(해발 591m)이 자리한다.

주차장에서 정상까지 오르는 길에 만난 초록 이끼. 녹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하다. 주차장에서 정상까지 오르는 길에 만난 초록 이끼. 녹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하다.
나무들도 온통 초록색 이끼 옷을 입었다. 나무들도 온통 초록색 이끼 옷을 입었다.
10분쯤 걸으면 대암산 꼭대기에 다다른다. 가운데 철탑이 보이는 곳이 정상이다. 10분쯤 걸으면 대암산 꼭대기에 다다른다. 가운데 철탑이 보이는 곳이 정상이다.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으로도 이용되는 정상에서 바라본 풍광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동쪽으로 초계면과 적중면에 걸친 드넓은 들판, 운석충돌구지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때마침 패러글라이딩 체험객이 비행을 시작한다. 서쪽으로 날아오른 뒤 180도를 돌아 동쪽 적중초계분지를 향해 유유히 비행한다. 5만 년 전 운석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가는 걸까. 북서쪽으로 보이는 시가지는 합천군청이 있는 읍내다. 대암산 정상부엔 5~6세기 대가야에서 쌓은 ‘합천 전 초팔성’이 있었다고 한다. 옛 성터여서 그런지 안내판 옆 나무 한 그루를 제외하면 사방이 탁 트였다. 풍광에 압도돼 발걸음을 돌리기 아쉽다.

긴 여운을 안고 산을 내려와 율곡면 내천리로 향한다. 황강변의 지산 정상에 있는 신비한 연못 ‘내천못재’를 만나기 위해서다. 400여 평 규모의 연못은 화산 폭발이 만든 화구호라는 얘기도 있지만, 자연 함몰로 생긴 것으로 추정한다. 정확한 연원을 알 수 없어서인지 연꽃과 수풀이 우거진 연못에서 신비한 기운이 솟아나는 듯하다. 물가엔 ‘급격한 수심변화로 물놀이에 주의하라’는 경고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문득 물속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진다. 끈질긴 연구로 합천운석충돌구의 연원을 알아냈듯, 내천못재 탄생의 비밀도 밝혀졌으면….

대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합천운석충돌구(적중초계분지). 하늘에 드리운 구름 덕분에 들판이 알록달록하다. 대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합천운석충돌구(적중초계분지). 하늘에 드리운 구름 덕분에 들판이 알록달록하다.
대암산 꼭대기에 덩그러니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옆에는 ‘합천 전 초팔성’이 있던 자리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대암산 꼭대기에 덩그러니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옆에는 ‘합천 전 초팔성’이 있던 자리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대암산 정상에서 패러글라이딩 체험을 할 수 있다. 대암산 정상에서 패러글라이딩 체험을 할 수 있다.
탄생의 비밀이 풀리지 않은 '내천못재'. 탄생의 비밀이 풀리지 않은 '내천못재'.

■ 다라국 문명이 꽃핀 ‘구슬밭’

내천못재에서 옥전고분군으로 가기 위해 황강을 건너 달린다. 합천호에서 흘러내려와 낙동강과 만나는 황강은 평온하면서 아늑한 매력이 있다. 차량으로 10여 분 거리에 합천박물관이 모습을 드러낸다. 박물관 뒤편으로 옥전고분군이 펼쳐지는데, 박물관을 먼저 둘러보면 옥전고분군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지난달 17일 한국의 가야고분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경사가 있었다. 경남 김해시 대성동고분군, 함안군 말이산고분군, 창녕군 교동과 송현동고분군, 고성군 송학동고분군, 합천군 옥전고분군, 경북 고령군 지산동고분군, 전북 남원시 유곡리와 두락리고분군 등 모두 7곳이다. 경사스러움의 여운이 현장에 남아 있다. 박물관 입구와 주변 마을 곳곳에 세계유산 등재를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옥전고분군의 입구에 들어선 합천박물관. 옥전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을 만날 수 있다. 옥전고분군의 입구에 들어선 합천박물관. 옥전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을 만날 수 있다.
박물관 입구에 마련된 다라국 미니어처 마을. 박물관 입구에 마련된 다라국 미니어처 마을.

옥전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은 합천박물관 본관 1층(다라문화실)과 2층(다라역사실)에서 상설 전시 중이다. 먼저 다라문화실 입구에는 다라국의 모습을 재현한 미니어처 마을이 조성돼 있다. 황강의 물길을 이용해 교역품을 나르는 모습, 구슬을 가공하는 다라국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후기가야를 이끈 대가야연맹체 중 하나인 다라국은 구슬 가공 기술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고분군의 이름 옥전(玉田)은 구슬밭이란 뜻으로, 예부터 이 지역에 구슬이 많이 나왔다. 옥전 M호분에서는 2000개가 넘는 구슬이 발견되기도 했다.

옥전고분군 유물 중에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굽다리접시나 투구·갑옷, 말머리가리개뿐만 아니라 말방울, 오리모양토기 같은 이색 유물도 눈에 띈다. 말방울에는 귀신얼굴 문양이 새겨져 있고, 오리모양토기에는 죽은 이가 편안히 저승으로 가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겼다.

옥과 유리로 만든 목걸이는 오늘날 장신구로 착용하기에도 손색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28호분에선 숫돌이 출토됐는데, 굽은 옥과 구슬 목걸이를 만들면서 생긴 흔적이 있어 당시 구슬 가공 기술을 짐작게 한다. 옥전고분군의 대표 유물은 손잡이에 봉황·용봉 문양 등의 장식이 있는 큰 칼이다. 합천박물관의 로고이기도 한데, M3호분에서 출토된 고리자루큰칼 4자루는 보물로 지정됐다.

옥전고분군의 대표 유물 중 하나인 용봉문고리자루큰칼. 옥전고분군의 대표 유물 중 하나인 용봉문고리자루큰칼.
굽은 옥을 만들면서 생긴 흔적이 남은 '숫돌'. 굽은 옥을 만들면서 생긴 흔적이 남은 '숫돌'.
옥전고분군에서 출토된 목걸이. 굽은 옥과 구슬로 만들어졌다. 옥전고분군에서 출토된 목걸이. 굽은 옥과 구슬로 만들어졌다.

박물관을 나와 드디어 고분군을 둘러볼 차례다. 탐방로를 따라 고분군이 있는 동산으로 올라가면 M26호분부터 M1호분까지 동그란 봉분 20여 개를 만날 수 있다. 봉분의 크기는 저마다 다른데, 전반적으로 대가야 지산동고분군보다는 작은 편이다. 고분군 구릉 정상부는 나무덧널무덤들의 위치가 표시돼 있다. 1985년에 가장 먼저 발굴이 시작된 자리다.

구릉 정상에서 내려다본 고분군은 주변 산세를 따라 어우러진다. 왕족의 무덤이라기보단 자연의 일부로 느껴진다. 고분군 북쪽 경계 너머엔 가까이 옥전서원이 자리한다. 조선시대 유생들은 가야인들의 무덤을 보며 무엇을 떠올렸을까.

5만 년 전 운석이 만들어 낸 지형과 1500년 전 다라국의 유적. 시공간을 허무는 만남 속에 신비로움을 너머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오늘날 현대 문명은 후대에 무엇을 남기고 전해야 할까. 후대는 오늘의 우리를 어떻게 기억할까.

글·사진=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성인 키보다 조금 높은 크기의 아늑한 봉분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옥전고분군. 성인 키보다 조금 높은 크기의 아늑한 봉분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옥전고분군.
구릉부 정상에서 바라본 옥전고분군. 주변의 산세와 어우러져 자연과 조화롭다. 구릉부 정상에서 바라본 옥전고분군. 주변의 산세와 어우러져 자연과 조화롭다.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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