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시선으로] 히로시마를 기억하며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소현숙 역사학자

영화 오펜하이머를 봤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핵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해 원자 폭탄을 개발한 핵물리학자 오펜하이머에 관한 이야기이다. 인터스텔라, 인셉션 등 수많은 화제작을 만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작품답게 영화는 흥미진진했다. 제2차 세계대전과 그 후 이어진 미소 냉전, 그리고 1950년대 미국 사회를 달군 매카시 열풍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배경 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 힘든 긴 대사들이 끝없이 이어졌지만, 팽팽한 긴장감으로 관객에게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세상을 파괴하는’ 역설 속에서 원자 폭탄을 개발한 오펜하이머는 이로 인해 핵물리학자로서 엄청난 명예를 얻었다. 그러나 전후 원폭 피해에 대한 죄의식으로 평화주의자가 되어 수소 폭탄 개발에 반대하고 결국 공산주의자로 몰려 모든 공직을 박탈당했다. 순수해 보이기만 하는 과학 연구가 얼마나 정치적일 수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쉽게 정치에 의해 이용될 수 있는지 흥미롭게 보여 준다. 원폭에 대한 비판 의식이 깔려 있기는 하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전쟁의 조기 종식을 위해 불가피했던 선택으로 보는 지극히 미국적인 시선은 어쩐지 찜찜하다. ‘물리학자들을 위한 헌정 영화’라 일컬어질 정도로 그들의 고투를 열정적으로 그려 내고 정치적으로 이용되다 결국 버려진 오펜하이머에 대한 동정적 시선 뒤에서 우리는 뭔가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투하된 원자 폭탄으로 두 도시에서는 그해 연말까지 각각 14만 명과 7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원폭은 피폭자 본인은 물론 후대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쳐서 죽음과 죽음에 이르는 고통이 대를 이어 지속되었다. 일본의 대표적 작가이자 양심적 지식인 오에 겐자부로는 히로시마 피폭자들의 고통과 비참한 삶을 그의 책 〈히로시마 노트〉에 기록했다. 그는 피폭 후 십수 년이 지난 1960년대 전반에 히로시마를 방문했지만, 원폭의 상처는 여전히 도시 곳곳에 남아 있음을 발견한다. 피폭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지켜 내려 애쓴 그들의 용기와 희생, 헌신을 전하며 겐자부로는 어느새 히로시마의 비극이 망각된 채 핵무기가 확산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한다. 인류가 이런 비극을 잊고 침묵할 자격이 있는지 물으며 그는 그러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은 오로지 온몸으로 원폭 후유증을 견뎌 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피해자들뿐이라고 준엄하게 말한다. 히로시마는 핵무기의 위력을 보여 주는 증거가 아니라 핵무기가 초래한 인간적 비참함의 극단적 증거일 따름이다. 오펜하이머를 보며 천재적인 물리학자들의 고투와 두뇌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동안, 우리는 어느새 원폭의 비참한 현실로서 히로시마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