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일의 곰곰 생각] 맨발의 도시 부산

김승일 기자 dojun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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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 예찬론에 수긍하면서도
부상·감염·불편 탓 대중화 안 돼
최근 부산 전역에 맨발 걷기 열풍
기인·예인·철인 아닌 시민이 주인공
지자체도 조례로 신설·관리 나서
삶의 질 제고와 관광자원화 기대

‘발은 공학의 걸작이자 예술 작품이다.’ 발의 해부학적 구조와 운동역학을 연구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정의다. 발바닥활(arch)과 아킬레스건은 착지 충격을 흡수하고 반작용으로 내닫게 돕는다. 다빈치는 발의 움직임과 균형을 기계역학으로 해석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도 강조했다.

직립 주행은 인류 진화의 원인이자 결과다. 두 발로 뛰어 사냥을 할 수 있게 되면서 단백질을 획득한 덕분에 두뇌가 폭발 성장했다. 발이 뇌 신경을 키운 덕분에 유인원과 결별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 걸작품이 신발 속에 갇혀 있다!” 맨발 예찬론자들은 두 발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이른바 발바닥 접지(接地·Earthing)론이다. 오장육부 신경 자극으로 맨발 걷기가 건강에 좋다는 속설에만 그치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서 구두와 운동화를 벗고 맨살로 땅에 내딛는 행위는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맥락으로 확장된다.


부산 수영만요트경기장에 10년 넘게 정박해 있던 ‘맨발호’ 이재호 선장은 맨발 기행의 끝판왕이었다. 그는 십수 년을 신발과 담을 쌓고 살았다. 시내버스와 도시철도는 물론 잦은 해외 출입국 때도 맨발을 고집했다. 등산화를 신지 않은 지리산 완등도 수십 차례. “신을 벗고 나서 자유를 만끽했다”는 게 이유다.

발바닥활 체형이 특이한지, 용불용설에 의한 것인지 물었더니 “반반인 것 같다”며 웃었다. “진흙길과 풀밭을 걸을 때 가장 행복했고, 아스팔트가 가장 힘들었다.”

포장된 도로는 딱딱해서 착지 충격이 무릎에 고스란히 전해져 고통스럽다. 즉, 바퀴를 위해 뻗은 길은 ‘걸작품’과 태생이 다르다. 달리 말하면 도시의 발전은 맨발의 자유도에 반비례한다.

‘맨발의 기봉이’ 사례도 있었지만, 러닝화를 거부한 마라토너도 제법 된다. 맨발 달리기를 진화론적으로 해석하는데, 발바닥활과 아킬레스건의 조응이 뇌를 각성하는 과정이어서 원시적이면서 가장 인간다운 몸짓이라고 믿는다.

등산 담당 기자 시절 전국 방방곡곡의 산길에서 마주치던 시그널(산행 리본) ‘맨발산악회’를 보고 대단한 조직이 있나 싶었다. 궁금해서 수소문한 끝에 부산 기장에 사는 등산 애호가를 만날 수 있었다. 개성 넘치는 산 사나이 단체로 알고 갔는데 실은 평생을 나홀로 산행한 분이었다.

외부 노출을 극히 꺼렸지만 간청한 끝에 달음산 동반 산행에 나섰다. 입산 후 묵언수행하듯 걷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맨발’을 내세운 까닭이 궁금했다. 그의 지론이 ‘인생은 빈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 내려놓은 홀가분한 발걸음을 표현하기에 맨발만큼 적확한 단어가 있을까 싶었다.

‘맨발의 디바’ 가수 이은미처럼 영국의 팝 스타 아델도 공연 중 구두를 벗고 무대에 오르는 것으로 유명하다. 공식 설명은 “노래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구두를 벗은 채 수천 수만의 관객이 지켜보는 무대에 홀로 서서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는 모습은 장관이다. 유튜브로 보노라면 마치 그 공연장에 빨려들어가 현장에서 환호하고 있는 듯한 몰입감을 만드는 매력이 있다.

이처럼 탈(脫) 신발은 단지 가죽이나 고무, 플라스틱을 몸에서 걷어 낸 물리적인 상태만을 일컫지 않는다. 그래서 다양한 상상력을 자극하고 사람 사이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연전에 부산 회동수원지 둘레길을 바장이다가 땅뫼산 황토숲길에 이르러 트레킹화를 손에 들고 바지를 걷은 차림의 거대한 인파에 놀란 적이 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그토록 즐거워하는 모습이란! 한결같이 “기분이 너무 좋다”며 신이 났다.

그사이 맨발 걷기 풍경은 해운대해수욕장 등 부산 곳곳으로 번졌다. 기초지자체들은 조례까지 제정해서 체계적인 관리와 시설 확충에 나서려 한다. 부산은 ‘맨발의 성지’로 발돋움하고 있다.

지금까지 맨발은 기인, 예인, 철인의 전유물이었다. 실내에서도 신을 신는 서구에서 족저근막염이 많다는 맨발 예찬론자들의 주장에 수긍하면서도 일반인들이 엄두를 내기란 쉽지 않았다. 저러다 다치면 어떡하나, 혹은 감염 우려는 없을까 찜찜해서다. 그 높은 문턱이 허물어지고 있어 다행스럽고 반갑다.

맨발의 부산! 이 구호는 부산의 매력에 남다른 강점을 보탠다. 안전하고 즐겁고 이색적인 추억을 쌓을 수 있는 도시! 끊임없는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킬러 콘텐츠다.

맨발 축제, 맨발 운동회, 맨발 문학회, 맨발 가요제…. 소소하게 맨발 줄넘기나 맨발 닭싸움도 좋다. 맨발 도시 부산! 시민 삶의 질을 높이고 관광자원 활용에 효과적인 새로운 부산의 미래 지향점이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김승일 기자 dojun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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