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번스타인을 기억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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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평론가

영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포스터. 조희창 제공 영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포스터. 조희창 제공

“예술은 답을 주는 대신 질문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상반된 답들 사이에서 긴장을 유발하는 역할을 한다.” 얼마 전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통해 개봉한 영화 ‘마에스트로:번스타인’은 이런 자막과 함께 시작한다. 브래들리 쿠퍼가 감독과 주연을 맡아 위대한 지휘자 번스타인의 삶을 조명했다. 음악 세계보다는 사랑 이야기가 많아서 음악 애호가들은 섭섭할 수 있겠지만, 번스타인이라는 음악가의 다양한 측면을 보여주는 역할은 한 것 같다.

레너드 번스타인(1918~1990)은 미국 하버드대에서 철학과 언어학을 전공한 후 음악계에 뛰어들었다. 뉴욕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가 된 그는 취임하자마자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오케스트라를 이끌어갔다. 공원에서 무료 음악회를 열어 지나가는 청중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텔레비전에 출연해 뉴욕필 청중 숫자를 세 배 이상으로 늘려 놓기도 했다. 당시 방송된 번스타인의 ‘청소년 음악회’ 시리즈는 에미상을 11회나 수상했고, 세계 40여 개국에 방송되었으며, 지금도 참고하는 스테디셀러다. 현재의 모든 ‘해설이 있는 음악회’는 번스타인 덕을 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지휘자인 동시에 탁월한 작곡가였다. 정통적인 클래식 곡부터 ‘온 더 타운’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같은 뮤지컬까지 각종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음악의 즐거움〉 같은 책으로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도 올랐다. 언론은 그를 두고 ‘르네상스맨’ 또는 ‘음악의 피터팬’이라 표현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도 그는 남달랐다. 유대인이면서도 좌파 성향을 지녔고, 가정을 사랑했지만 양성애자이기도 했다. 〈뉴욕타임스〉의 음악평론가 해럴드 숀버그는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두 가지 속성을 항상 같이 보여주었다. 한편으로는 베토벤과 현대음악에 몰두한 ‘머리 긴 음악가’의 모습이었으며, 또 하나는 소년 같고, 적당히 비속어도 사용하며, 재즈를 좋아하고, 도시적 배경을 가진 모습이었다. 그 어떤 위대한 출판물도 번스타인이란 인물처럼 미국의 음악적 풍경을 제대로 보여주지는 못했다.”

영화에서 인용한 말처럼, 번스타인은 삶과 예술의 방식에 대해 끝없이 질문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상반된 대답 사이를 오가며 긴장과 타협을 추구했고, 그 속에서 참으로 다양한 성과를 보여준 사람이었다. ‘마에스트로’라는 존칭은 이럴 때 붙이는 말인 것 같다. 21세기 한국 땅에서도 새로운 질문으로 무장한 젊은 지휘자들을 자주 볼 수 있기를 기대하며,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의 영상 한 편을 보탠다.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중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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