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화의 크로노토프] 클래식 스타에게 유독 관대한 부산 관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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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음악 칼럼니스트

옛말에 “물건을 모르면 값을 더 주라”는 말이 있다. 물건을 몰라 속는다는 뜻이 아니라 잘 모르는 물건은 비싼 것이 제값을 한다는 뜻이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말은 공연을 선택하는 데에도 어느 정도 통한다. 언론에 자주 노출되고 많은 찬사가 따라다니는 연주자의 공연은 대개 기본 수준을 상회한다. 자연스레 신뢰하며 기꺼이 비싼 값을 치러 예매하고 시간을 내어 공연장을 찾는다.

원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 잔뜩 기대하고 간 공연에서 엄청난 실망을 하고 돌아오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하지만 수많은 찬사가 따라다니는 유명 연주자에 대한 기대는 공연을 선택하고 관람하러 간 관객만의 탓은 아닐 것이다. 그 기대는 개인적인 생각으로 억측한 것일 수 있지만, 여태껏 있었던 다른 사람의 평가를 통해 관객들이 바라고 있던 것이다.

세계적 대가들 무성의한 부산 공연 실망

명성만 보고 박수 치며 환호하면 곤란

수준 높은 부산 관객 ‘무서움’ 알게 해야

지난 몇 년 동안 전 세계는 듣도 보도 못한 바이러스로 자가격리와 거리 두기라는 갑갑함을 경험했다. 공연계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공연이 축소 또는 취소되었고, 예술 애호가들 또한 마음 편히 공연장을 찾을 수 없었다. 팬데믹은 작년이 되어서야 끝나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공연계도 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 갑갑함에 대한 보상 심리 때문인지 공연장은 연일 매진 또는 성황을 이루었다.

그런데 공연을 하나씩 살펴보면 부산을 거친 자칭 타칭 ‘대가’들의 공연 중에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도 꽤 있었다. 세계적인 바이올린 연주자로 손꼽히는 사라 장의 2022년 12월 연주에서는 새로움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콩쿠르 우승자 양인모는 마치 리허설 같은 연주를 들려주고 갔다. 새로운 음반에 수록된 곡들로 독주회를 가진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자 선우예권의 피아노 연주는 무성의했다. 뒷짐을 지고 나온 무대 인사는 차치하더라도, 눈에 다래끼가 났으니 반대쪽 얼굴 사진만 찍어달라고 요구하는 모습은 연주보다 쇼맨십이 더 눈에 띄었다.

음악 전공자들의 귀감이라는 피아니스트 언드라시 시프는 2년 연속 공연을 펼쳤는데 거의 같은 프로그램 구성과 늘 듣던 멘트로 새로움을 기대하는 청중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은 완벽한 연주를 위해 개인 피아노까지 들고 다니며 무대 위나 밖에서의 컨디션 조절에 극도로 예민하여 사진 한 장 찍는 것조차 금지한다. 그는 심한 감기에 걸렸는지 공연 내내 콧물을 훔치고 기침하며 감동 없는 밋밋한 연주로 시간만 때우고 떠났다. 문제는 이 모든 공연이 부산을 대표하는 공공 공연장의 기획 공연이라는 점이다.

이들의 실황을 본 객석의 반응은 다양했다. “리허설하러 온 줄” “부산이 만만하게 보이나?” “할인 못 받고 비싼 좌석 샀으면 아까웠을 뻔” “유명 연주자가 부산만 오면 연주가 안 된다” “음악 잘 모르는 아시아에 돈 벌러 왔네” “나만 그런가? 왜 음악에 감동이 없지?” 등의 불만이 터졌다. 심지어 다시는 저들의 연주를 보러 가지 않겠다는 애호가들도 제법 있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최한기는 “귤이 회수를 넘으면 탱자가 되고, 오소리가 문수를 넘으면 죽어버리는 것은 모두 땅의 기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라 했다. 정약용도 “유자가 강진 땅만 벗어나면 탱자가 되고 만다”며 통탄했다. 부산 바닷물에 절어서 그런가? 유독 연주자들이 낙동강을 넘어 부산만 오면 탱자가 되는 이유를 모르겠다. 국내 연주자뿐만 아니라 투어를 도는 해외 연주자 중 부산에만 오면 연주가 안 되는 연주자들이 저들 말고도 제법 있다.

어떤 까닭인지 정확히 모르겠으나 혹시 그들이 부산이라는 도시의 예술 지형을 가볍게 생각하고 있지 않는지 묻고 싶다. 스타 예술가가 받는 개런티에는 예술 활동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자기관리 비용까지 포함되어 있다. 적어도 무대에 서는 예술가라면 자기관리에 철저해야 한다. 물론 사람이 하는 일이라 완벽할 순 없겠지만 최소한 관객의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 십수만 원이나 되는 티켓을 사고 귀한 저녁 시간을 오롯이 그들의 공연에 할애하는 관객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다.

아티스트의 명성에만 기대서 분별없이 박수 치고 환호하면 곤란하다. 대개 슈퍼스타들의 연주가 성의 없고 부실한 것은 관객을 존중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것을 따져 물어야 관객 수준의 무서움을 알게 된다. “바닷가에서 회 한 접시 먹고 놀다 오자”는 말보다 “부산에 가서 대충 연주하면 안 되겠더라”라는 말이 연주자들의 입에서 나오게 해야 한다. 부산 공연 문화 수준을 더 높이는 일, 그것은 관객의 수준에서 시작한다. 유명하다고 무조건 박수갈채를 보내지 말자. 비싼 값을 치른 관객은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관객의 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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