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란 경계 넘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일 [세상에이런여행] 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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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는 낱말(3)경계>

시간 적고 갈 곳 많아 늘 새 여행지 선택
뒷골목 거닐며 도시 풍경 들추는 일 근사
두 번 간 도시는 튀르키예 이스탄불 유일
두 세계 영토·종교 중첩된 시간여행 흥미

창밖 풍경 한국 아니기만 해도 이미 여행
국경이라는 경계 넘어 보면 허망만 할 뿐

한 번 여행했던 곳은 좀처럼 다시 찾지 않는 편이다.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여행해도 좋은 곳이 세상에는 많다. 나도 잘 안다. 하지만 나는 대체로 새로운 장소에 마음을 뺏기고 만다. 여행했던 곳을 다시 여행하는 낭만도 누리고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도 골고루 여행하면 참 좋으련만, 여행할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고 세상엔 가보지 못한 곳이 너무너무 많다.

그래서 그리운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항상 새로운 여행지를 선택하게 된다. 내가 그리워하는 곳을 여행으로 다시 만나진 못해도, 운 좋게 출장이라도 가게 되기를 항상 바란다. 내가 거닐던 뒷골목을 다시 걷는 일, 허름한 어떤 식당에서 그때 먹었던 음식의 맛을 기억하며 다시 먹는 일, 그대로인 듯한 도시의 풍경을 세심하게 들추어가며 작은 변화를 짚어내는 것 또한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는 것만큼이나 근사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수많은 관광객과 이스탄불 시민이 갈라타탑이 보이는 갈라타 다리를 걸어가고 있다. ⓒ박 로드리고 세희 수많은 관광객과 이스탄불 시민이 갈라타탑이 보이는 갈라타 다리를 걸어가고 있다. ⓒ박 로드리고 세희

편력으로 점철된 내 여행에서 이례적으로 다시 찾아 여행한 곳이 있다. 튀르키예의 수도 이스탄불이다. 이스탄불은 로마 제국 수도인 콘스탄티노플로 천 년 가까이 위세를 누렸고 후에는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중심적 도시로서 여전한 위세를 누렸던 도시다. 그래서 지금 이스탄불엔 그리스도교를 근간으로 하는 로마 제국의 유적과 이슬람교를 근간으로 하는 오스만 제국의 유적이 한데 뒤섞여 남아 있다. 두 제국은 천 년이라는 시간차를 두고 흥망성쇠를 겪었고 풍토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그래서 이스탄불 여행은 도시에 새겨진 중첩된 시간을 여행하는 일이다. 중세 로마와 근대의 오스만, 그리고 현대 튀르키예까지.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여행객들이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한 이스탄불의 아야 소피아에서 사진을 찍느라 정신을 놓고 있다. ⓒ박 로드리고 세희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여행객들이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한 이스탄불의 아야 소피아에서 사진을 찍느라 정신을 놓고 있다. ⓒ박 로드리고 세희

이스탄불 여행의 백미는 아야 소피아일 것이다. 비잔틴 건축의 대표적 걸작으로 꼽히는 아야 소피아는 로마 제국 시절 그리스도교의 성당으로 지어졌으나 오스만 제국에 점령당한 뒤로는 증축을 거쳐 이슬람교의 모스크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박물관이 되었다. 비잔틴 건축의 특징이란 건물 외부보단 내부의 장식에 치중하는 것이어서 성당의 내부는 화려한 모자이크 성화로 가득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슬람 풍속에 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의 지도자들은 이교도의 아름다운 성소를 파괴하는 대신 내부에 회칠을 하여 성화를 가리고 외부에는 이슬람 건축의 특징인 첨탑을 추가로 세워 모스크로 사용하게 했다. 최고의 모스크를 의미하는 네 개의 첨탑을 세웠음은 물론이었다. 종교를 초월해 관용의 미학을 품은 아야 소피아는 현대 튀르키예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타튀르크에 의해 다시금 박물관으로 변용되었다. 지금은 내부의 회칠을 모두 벗겨내어 성화를 감상할 수 있다. 종교의 경계를 지우고 두 제국의 시간이 겹쳐 있는 아야 소피아는 여행자에게 더없이 감사한 유산이다.

튀르키예 이스탄불의 쇼핑 명소인 그랜드 바자르가 발 디딜 틈도 없이 쇼핑객으로 붐비고 있다. ⓒ박 로드리고 세희 튀르키예 이스탄불의 쇼핑 명소인 그랜드 바자르가 발 디딜 틈도 없이 쇼핑객으로 붐비고 있다. ⓒ박 로드리고 세희

이스탄불에 겹쳐 있는 것은 시간만이 아니다. 이스탄불은 유럽 대륙과 아시아 대륙에 걸쳐 있다. 튀르키예는 정치적으로는 유럽에 속해 있지만 지리적으로는 영토 대부분이 아시아에 속한다.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는 것이 보스포루스 해협인데 이스탄불은 이 해협의 양쪽을 함께 품고 있다. 즉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있는 대륙의 경계도시인 거다. 여기서 말하는 경계란 두 세계의 중첩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내가 이스탄불을 다시 찾아 여행하게 된 까닭이다.

나는 20대 시절 여행에 매료되어 빈번하게 여행을 다녔다. 그때야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았으니 주로 가까운 동아시아 일대를 다녔는데, 매번 여행을 갈 때마다 항공사에 갖다 바치는 돈이 아까워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묘안이라고 떠올린 게 찔끔찔끔 여행을 다니지 않고 한 번 떠나서 아시아의 모든 곳을 여행하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는 2년이 걸린 여행이었는데, 아시아 대륙의 대장정 출발점이 바로 이스탄불이었다. 이스탄불에서 시작해 아라비아 반도,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를 두루두루 섭렵하며 수십 개의 국경을 넘어 집으로 돌아왔다.

국경이라는 경계를 넘는 일은 때때로 고단했지만 그것을 넘고 보면 과연 그 실체가 무엇인지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국경이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실재하지도 않는 가상의 경계니까. 나에게 여행이란 결국 경계를 몸으로 넘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었다. 그렇게 아시아 여행을 마친 후, 요즘의 나는 유럽을 여행 중이다. 한 번에 긴 시간을 내지는 못하고 일 년에 두어 번씩 짧게 다녀가기를 수년째 하고 있다. 이스탄불은 아시아 여행 때 이미 다녀갔으니 유럽 여행을 한다고 해서 꼭 다시 다녀가야 하는 건 아니었지만, 대륙이 중첩되어 있고 제국의 영광이 중첩되어 있는 이스탄불을 다시 여행하면 내 여행의 시간도 중첩될 것이었다. 그러다보면 지난 아시아 여행과 지금 유럽 여행의 경계도 지워져서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저 여행하고 있는 사람이 된다.

고전적 분위기가 가득한 튀르키예 이스탄불 시내에 현대적 트램이 달리는 모습은 과거와 현대라는 시간의 중첩을 느끼게 한다. ⓒ박 로드리고 세희 고전적 분위기가 가득한 튀르키예 이스탄불 시내에 현대적 트램이 달리는 모습은 과거와 현대라는 시간의 중첩을 느끼게 한다. ⓒ박 로드리고 세희

유럽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영국 런던이었다. 아시아 여행을 마치고 현업에 복귀한 후 어느 자동차 회사의 광고를 촬영하기 위해 출장을 간 것이었다. 새로운 대륙의 대장정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촬영 장소를 찾기 위해 런던의 명소를 돌아다니며 답사를 했고, 일을 마친 후 저녁이면 미술관을 찾아 머리를 식혀가며 다음 날의 일을 구상했다. 해외 출장에서는 보통 예비일을 둔다. 날씨를 비롯해 예상하지 못한 현지의 여러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여분의 일정이다. 촬영을 무사히 잘 마치면 예비일은 각자의 몫이 된다. 누군가는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쇼핑을 다니기도 하지만 나에게 예비일은 온전히 여행할 수 있는 시간이다. 나에게 출장은 여행과 매우 비슷하다. 촬영장으로 출근하는 길에 창밖으로 흐르는 풍경이 한국이 아니라는 것 만해도 이미 여행 아니겠는가.

나에게 여행이란 세상의 모든 경계를 넘나들며 지우는 일이다. 몸으로 국경을 넘는 것은 물론이고 대륙의 경계까지 지우는 것, 도시에 중첩되어 있는 시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 일과 여행의 경계를 지우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론 삶과 여행 사이를 가르고 있는 보이지 않는 경계를 지워내는 것에 이르고 싶다.

박 로드리고 세희 촬영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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