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시선으로] 까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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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현 역사문제연구소 인권위원

차별을 받거나 부당한 일을 당할 때 사람은 예민해진다. 세상에 많은 차별과 부당함이 있지만, 그 중 적잖은 수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게 집중된다. 때문에 그런 일을 겪은 것과 그 결과 예민해진 몸과 마음은, 마치 그 사람이 애초에 사회적 약자이고 소수자인 탓으로 여겨진다. 좀더 ‘정상’적이고 ‘표준’적인 사람이었다면, 대체로 그런 나쁜 일을 겪지도 않았을 것이고 예민할 일도 없었을 테니까.

사람은 대체로 어떤 것이 나에게 유리하고 어떤 것이 힘센 대세에 가까운지를 잘 눈치챈다. 따라서 내가 겪은 피해와 그것을 알아채게 한 예민함은 나에게 취약하고 덜 유리한 본성으로 느껴진다. 그런 까닭에 어떤 사람들은 그 피해와 예민함을 숨기고, 마치 처음부터 그런 게 없었던 듯이 스스로를 속인다. 그런 것들은 왠지 나에게 유리한 것 같지 않으니 그저 없는 것처럼 생각해두고 싶다.

피해와 까탈로 자신을 요약당하고 싶은 사람은 적기 때문에, 이런 반응들은 그 나름대로 스스로를 지키려는 움직임이다. 문제는 이런 습관을 자기 잇속대로 써먹는 나 아닌 다른 존재들이다. 차별과 부당함을 애초에 없었던 일로 치부하는 것은, 다름아닌 그 차별과 부당함을 생산한 이들에게 가장 이롭다. 그들의 눈에는 애초에 그런 것은 없고, 그걸 꺼내어 말하는 쪽이 어딘가 이상한 것이다. 피해를 입을 만했으니 입었겠고, 평소에 예민한 사람이 저런 소리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거라는 식이다.

세상의 힘센 질서와 차별을 낳는 사회구조는 어디에 외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람의 몸에 스며들고 학습되는 과정을 통해 작동되고 재생산된다. 그렇게 구조가 몸으로 스며드는 여러 방식들 가운데 앞서의 일이 있다. 내가 입은 피해와 그로부터 얻은 까탈이 싫어 아무쪼록 그것을 숨기고 싶었던 연약한 형태의 존엄은, 남들에 의해 그것 보라며, 그건 원래 없던 일이었고, 그건 너의 까탈이 만들어낸 망상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빼앗기고 이용당한다.

까탈을 부리는 건 대체로 비참한 일이고, 까탈을 부리는 게 즐거워서 부리는 사람은 아주 적다. 까탈이 비참한 이유는 그 까탈의 입장이 이 세상에서 대세일 수가 없음을 그 당사자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미워 까탈을 부릴 이유가 없는 힘세고 강한 편에 빙의해 살 필요는 없다. 까탈을 내리누른다고 내가 힘세고 강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참한 까탈을 부리는 입장을 지키고 사랑하는 것이 그 비참을 이겨내는 첫번째 관문이다. 누구나 힘세고 강하고 덜 예민하고 덜 까탈스럽기를 원한다. 그럴 수 없는 스스로를 잘 어루만지는 일은 중요하고, 그것은 그 입장을 나라도 편드는 일에서 시작된다. 자신을 스스로 편들지 않는 일은 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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