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권의 핵인싸] 더 중요한 것은 시간과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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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물리학과 교수

대규모 의대 정원 확대 전격 결정
이유·절차 무시 연구개발비 삭감
로드맵 없는 정책은 혼돈만 초래

세상 만물의 원리가 ‘움직임(운동)’에서 시작됐다는 것에 주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움직임’이라는 것은 ‘시간’에 따라 ‘위치’가 변하는 현상으로 시공간의 의미를 모두 함축한다. 모든 과학은 결국 시공간에 존재하는 물질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 놀라운 것은 이것들의 ‘변화’에 주목한 뉴턴의 직관이다. 일정 시간 동안 위치가 변하는 ‘움직임’을 정량적으로 나타낸 것이 바로 ‘속도’다. 눈을 감은 채로 조용한 차를 타고 있으면, 출발하거나 설 때를 제외하면 차가 아무리 빠르다 해도 그 움직임을 직접적으로 알아챌 수가 없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두 가지를 눈치챌 수 있다.

첫째, 움직임(운동)은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눈을 뜨고 뒤로 움직이는 창밖을 봐야만 ‘움직임’을 알게 된다. 즉, 시간도 위치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전지구적으로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는 시간과 위치를 알려주는 GPS(Global Positioning System)도 공간과 시간에 대한 상대론적인 보정이 필수적이다.

둘째, 움직임(운동·속도)의 ‘변화’는 절대적이다. 즉, 원래 정지 상태에서 일정한 속도를 갖기까지 속도가 증가하거나,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다가 브레이크를 밟아 속도가 줄게 되면, 우린 아무리 눈을 감고 있어도 이를 즉시 알아챌 수 있다. ‘외력(외부의 힘)’이 있는 것이다. 여기엔 속도가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방향’이 있다.

결국 우주의 비밀은 기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상대적인 것’과, 얼마동안 어떻게 변하는지를 의미하는 ‘변화율’에 있다. 바로 이 ‘변화율’을 다루기 위해서 새롭게 도입된 수학적 도구가 미적분학이며, 문·이과를 막론하고 ‘변화’를 다루는 다양한 학문 분야에 두루 사용된다. 단순히 변화가 있는지 없는지가 아니라, 적절한 시간 동안 변화한 정도와 그 방향에 따라, 즉 순간 및 평균변화율의 부호와 크기에 따라 미래가 달라진다.

우리가 경험하는 이 사회현상들도 이것들을 벗어날 수가 없다. 즉, 부와 권력도 모두 상대적인 것이며, 모두가 얼마나 많아질 것인지에만 관심이 있지만, 실은 ‘언제’ 몰릴 것인지, ‘얼마나 오랫동안’ 유지될 것인지, 그 변화율이 훨씬 더 중요한 관건이다. 재화의 속성상 물가와 주식은 결국 언젠가는 오를 것이 분명하지만 언제 얼마나 오르느냐, 그것이 그때 나의 필요에 맞을 것이냐가 훨씬 더 중요한 관건이라는 뜻이다.

국민이 필요로 하는 의사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한다. 많이 보도된 내용이지만, 2021년 기준 우리나라의 임상의사(한의사 포함) 수는 인구 1000명당 2.6명으로, OECD 평균 3.7명에 훨씬 못 미치며, 오스트리아(5.4명)나 노르웨이(5.2명)의 절반 수준이란다. 지난 정부 때부터 지적돼 온 얘기다. 한편, 전 국민 의료보험으로 낮은 의료수가와 열악한 전공의 근무환경 등 상당히 어려운 여건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모든 수험생들과 직장인들은 모두 의사가 되기를 바라는 모양이다. 다른 직업에 비해 월등히 좋은 경제적 여건과 직업적 안정성을 지향한다고 밖에 이해할 수 없다. 이런 특권이 부족한 의사 수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번번이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정책은 의료인들의 강한 저항에 맞닥뜨려야 했다.

의료혜택이 필요한 국민의 입장에서 나라의 의료 인력이 충원된다는 일은 정말로 환영할 일이지만, 불과 1년 만에 3000명에서 5000명으로 3분의 2를 갑작스럽게 증원시킬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또 이렇게 한다고 해서, 특히 ‘상대적으로’ 갈수록 심각해지는 지역·필수 의료에 대한 문제가 해결될 성질의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의대생이 갑자기 매년 2000명씩 증가하면 교수도, 교실도, 특히 실습이 중요한 의료교육 현장이 어떻게 수용가능할 것인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아무리 의료인들의 저항이 완강했던 탓이라지만, 지난 19년 동안 단 1명도 증원이 없다가 갑자기 일시에 3분의 2를 증원시킨다는 이런 충격적 변화율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보다 장기적인 방향성을 갖고, 변화율을 치밀하게 생각해서 차근차근 진행시키는 그림을 로드맵이라고 한다. 도무지 이 나라엔 거의 모든 분야에서 로드맵이 없다. 작년엔 갑자기 아무 절차나 이유도 없이 막대한 연구개발비가 삭감되고, 줄어드는 학령인구와 심각한 지역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첨단 분야의 급격한 증원이 수도권에 집중되는 등, 솔직히 이 정부의 종잡을 수 없이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일들이 전혀 미덥지가 않은 이유다. 이렇듯 변화율이 요동치고 예측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면 시스템은 안정성을 잃고 혼돈에 빠질 확률이 크다. 선거를 앞둔 지금 시점에선 특히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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