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에겐 각자의 소울 푸드가 있다 [세상에이런여행] 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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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는 낱말 (4) 소울 푸드>

여러 나라 다니지만 음식 연연하지 않아
여행이 주는 큰 즐거움 하나 놓쳐 버린 셈

어디엘 가도 된장찌개, 국밥 한 그릇 간절
밥에 고추장 비벼 먹고 티베트 고산병 회복
이국서 힘들 때 그리운 음식 찾는 건 본능

러시아의 항구 도시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을 다녀왔다.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유럽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도시답게 일본으로 가는 정도의 비행시간으로 아시아를 완전히 벗어난 도시를 만날 수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음식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곳이었다. 서양식 중에서도 너무 뻔하지 않은 동유럽 전통음식이 다양하고 킹크랩을 비롯한 해산물도 풍부하고 저렴했으며, 유제품이나 빵 또한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로웠다. 한국, 중국, 일본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즐비했고 심지어는 북한 식당까지 있었으니 식도락가들에겐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그러나 나는 별미에 연연하지 않고 끼니를 대충 때웠다. 몇 번은 숙소에 딸린 주방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고, 대부분은 마트에서 산 샐러드나 과일로 끼니를 때웠다. 아니면 아예 굶거나.

설산에 오른 두 남녀가 환하게 웃으며 식사하고 있다. ⓒ박 로드리고 세희 설산에 오른 두 남녀가 환하게 웃으며 식사하고 있다. ⓒ박 로드리고 세희

나는 음식 먹는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여행이 주는 큰 즐거움 하나를 놓치고 있는 셈이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던 청년시절에 여행을 다니자니 이것저것 욕망을 다 채울 수가 없어 가장 먼저 포기해야 했던 것이 식도락이었는데, 그 시절 몸에 밴 습관이 여태 이어지는 듯하다. 물론 나도 처음에는 이국 음식을 접하는 경험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뉴욕으로 출장이라도 가게 되면 스테이크를 비롯한 양식을 먹을 생각에 설레곤 했는데, 결정권을 가진 어른들은 매 끼니 맨해튼 한가운데에 자리한 유명 한국 식당으로 향했다. 여기까지 와서 도대체 왜! 멕시칸 셰프가 끓여 낸 설렁탕에 감탄을 쏟아내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요즘은 내가 나서서 동료나 후배들을 설득해 한국 식당으로 가곤 한다. 어느덧 나도 그저 익숙한 음식을 배불리 먹는 게 좋은 ‘꼰대’가 된 것이다. 몇 번의 혹독했던 경험을 탓하고 싶다.

스페인을 상징하는 음식 중 하나인 하몽. 스페인 어디에서나 식품점 앞에 매달린 돼지 허벅다리를 볼 수 있다. ⓒ박 로드리고 세희 스페인을 상징하는 음식 중 하나인 하몽. 스페인 어디에서나 식품점 앞에 매달린 돼지 허벅다리를 볼 수 있다. ⓒ박 로드리고 세희

커피의 무역 루트를 추적하는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기 위해 서아프리카로 출장을 간 일이 있었다. 워낙 풍토병이 만연한 곳이라 황열병, 뎅기열, 장티푸스를 비롯해 예방접종을 필수적으로 해야 했고, 현지인 요리사가 제작진과 동행하며 식사를 제공했다. 음료나 초콜릿 같은 간식까지도 요리사가 주는 것만 먹을 수 있고 현지에서 어떠한 음식을 사 먹는 것도 금지됐다. 요리사가 동행했다고 해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 달 내내 똑같은 재료로 만든 스파게티와 볶음밥을 끼니마다 번갈아 가며 먹어야 했다. 병에 걸리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끼니였다. 다채로운 식자재를 구할 수 없는 오지였고 아프리카인 요리사가 한식 레시피를 가졌을 리도 없었다. 40~50도에 이르는 더위보다 스파게티가 더 두려웠다. 그럴 땐 어떤 산해진미보다 된장찌개나 국밥 한 그릇이 간절해진다.

유럽의 한 식당에서 사람들이 음식을 먹고 있다. ⓒ박 로드리고 세희 유럽의 한 식당에서 사람들이 음식을 먹고 있다. ⓒ박 로드리고 세희

티베트를 여행할 때엔 고산병을 앓은 적이 있었는데 코르크 마개가 식도를 막는 듯한 통증 때문에 어떤 음식도 쉬이 넘어가지 않았다. 따로 약이 없는 병이라 병원에 가도 고작 포도당 링거를 맞는 것이 다였다. 그렇게 이틀을 앓고 나니 배낭 구석에 들어있던 고추장과 라면이 생각났다. 여행 중에 만났던 어떤 한국인이 먼저 귀국하며 남겨 준 것이었는데,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이 몸이 축나자 떠올랐던 것이다. 밥에 고추장을 비비고 라면을 하나 먹었다고 해서 고산병이 낫진 않았지만, 컨디션이 한결 좋아진 건 분명했다.

이국 음식에 흥미를 가지는 것도 본능이지만 반대로 몸과 마음이 힘들거나 아플 때 가장 익숙한 음식을 찾게 되는 것도 본능이다. 이른바 소울 푸드. 어떤 문화에서는 터부시하고 먹지 않는 음식이 다른 문화에서는 아주 귀한 음식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에겐 각자의 소울 푸드가 있다. 어느 함경도식 냉면집에선 함경도가 고향인 사람들이 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정기적으로 모인다고 한다. 그분들에겐 냉면이 소울 푸드인 것이다. 부산이 고향인 내 소울 푸드 목록엔 돼지국밥이 있다. 부산에선 정말 흔한 음식인데, 경상도를 벗어나면 제대로 맛을 내는 곳을 만나기 힘들다. 부산에 가게 되면 꼭 돼지국밥을 먹는다. 부산에게 건네는 일종의 인사 같은 나만의 작은 의식이다.

오늘날 전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코카콜라. 젊은 세대에게는 소울 푸드일지도 모른다. ⓒ박 로드리고 세희 오늘날 전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코카콜라. 젊은 세대에게는 소울 푸드일지도 모른다. ⓒ박 로드리고 세희

나는 베트남 쌀국수도 즐긴다. 베트남을 여행하며 좌판 식당에 쪼그려 앉아 우리 돈 오백 원 정도 하는 쌀국수를 함께 먹던 현지 친구들이 그립기 때문이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았지만 쌀국수는 응당 이렇게 먹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듯, 손으로 라임을 꾹 짜서 내 몫의 쌀국수 위에 뿌려 주던 친구들을 어찌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칭자오러우쓰라는 고추잡채도 즐긴다. 중국을 여행하며 매일 같이 먹던 음식인데, 채 썬 고추와 돼지고기를 볶은 간단한 음식이다. 식당마다 맛의 편차가 적어 실패할 확률이 낮았고 무엇보다 저렴했다. 매일 점심을 진저로스 한 접시를 시켜 절반만 먹고 남은 절반은 싸 달라고 해서 배낭에 넣고 다녔다. 그러면 저녁엔 공기밥만 하나 사서 숙소로 돌아와 남은 칭자오러우쓰를 먹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청승이었나 싶지만 그때는 돈을 아껴 여행을 길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가난했던 여행을 추억하며 나는 여전히 칭자오러우쓰와 쌀국수를 찾는다. 그래서 두 음식도 당당히 내 소울 푸드의 목록에 들어간다.

진미라 할 순 없어도 음식에 얽힌 추억이 내 안에 생동하고 있으니 자격이 충분하다. 낯선 음식보다 익숙한 음식에 이끌리며, 오래된 여행자는 그렇게 나이 들어간다.

박 로드리고 세희 촬영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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