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공주처럼 모시겠다"는 블록체인 공약

김백상 기자 k10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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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두고 가상자산 공약 봇물
재탕 논란, 전문성 의심 등 비판도
관련 업계의 기대감도 높지 않아
4월 10일 이후에도 관심 유지 필요

어느 때보다 정치인들이 겸손해지는 시기다. 누가 유권자의 마음을 더 얻느냐에 따라, 당과 후보의 운명은 극명하게 갈릴 것이다. 4월 10일이 불과 한 달여 정도 앞으로 다가왔으니, 지금 즈음 국회 입성을 노리는 당사자들은 정말 애간장이 탈 것이다.

누군가의 환심을 사야 하는데 시간이 촉박할 때, 가장 쉬우면서도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 카드가 선물 공세다. 정치인이 유권자에게 물질적 선물을 주는 건 불법이다. 현재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 말로 하는 약속이다. 온갖 민원과 로비에도 잘 움직이지 않는 정치인들이 나서서 특정 유권자들에게 유리한 법을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을 한다. 누구라도 혹할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가상자산 투자자와 블록체인 업계 사람들은 운이 좋은 편이다. 여야 모두 가상자산 투자자들의 환심을 살 수 있는 공약을 무더기로 내놓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크립토 윈터’가 끝날 조짐이 보이더니, 어느새 비트코인이 7000만 원을 훌쩍 넘었다. 가상자산에 투자했거나 투자를 고려하는 이가 늘어나 선거에 영향을 줄 정도의 세력화가 되면서, 정치권에서도 반응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국민의힘, 더불어민주당 모두 비트코인 현물 ETF 발행·상장·허용 검토, 법인의 가상자산 투자 단계적 허용, 가상자산발행(ICO) 단계적 허용 등을 공약으로 내놓았거나 내놓을 예정이다. 국민의힘은 가상자산 과세 2년 유예 공약을 검토 중이고, ‘디지털자산 진흥 전담위원회’ 설치하기로 했다. 민주당은 매매수익의 공제한도 20배로 늘리고, 토큰증권(ST) 관련법도 조속히 통과시키로 했다.

공약 하나하나가 업계가 간절히 바라던 민원을 들어주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반응은 시큰둥하다. 정치인들이 앞으로 잘하겠다고 말이라도 해주는 게 고맙기는 하지만, 그다지 믿음이 안 간다는 반응이다. 업계의 불신은 경험에서 나온 거다.

2020년 총선 당시 현 여권인 미래통합당은 5000억 원 규모의 블록체인 산업 육성 펀드 조성을 약속했다. 민주당은 신기술·산업 분야 규제를 네거티브 방식(금지된 행위 외에 모두 허용하는 방식)으로의 변경을 내걸었다. 2021년 대통령 선거 때에는 여야에서 매매수익 과세 한도 상향, 가상자산발행 허용, 디지털산업진흥청 설립 등의 공약이 나왔다. 윤석열 대통령도 가상자산 시장에 네거티브 규제 시스템을 도입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 총선과 대선 과정에 나온 공약 대부분은 공수표였다. 공약 실현을 위한 정치권의 노력도 딱히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도 정치인들의 약속은 빈말로 끝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올 법도 하다. 당장 국회가 처리하지 못해 계류 중인 블록체인과 가상자산 관련 법안들도 있으니, 공약의 진정성은 더욱 의심된다.

공약들에서 고민의 흔적도 딱히 보이지 않는다. 현물 ETF 허용, 과세 유예나 공제한도 상향 등은 지금 이슈가 되고 있는 사안과 민원들을 그대로 가져와 발표한 듯한 느낌이다. 입법 과정에서 예상되는 어려움이나 부작용 등을 진지하게 검토한 뒤 내린 결정은 아닌 것 같다는 의심이 강하게 든다.

무엇보다 블록체인 생태계를 위한 공약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가상자산은 블록체인 기술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블록체인 기술을 어떻게 끌어올리고 관련 기업을 육성할 것에 대한 비전은 없고, 가상자산 투자심리를 자극하는 약속들이 대부분이다.

전체적으로 블록체인 비전문가들이 급한 마음에 포퓰리즘에 기대 만들어낸 공약들처럼 보인다. 그러니 공약 실현 가능성에 대한 업계의 기대치가 낮은 것이다. 아마도 정치인들이 블록체인을 잘 모르다 보니, 간단하고 즉각적인 것들 위주로 공약을 채운 듯하다. 마치 데이트할 때엔 배려심 있는 모습이라곤 전혀 안 보이던 남성이 갑자기 “손에 물 안 묻힐 정도로, 공주처럼 모시겠다”며 프러포즈하는 느낌이다. 그만큼 빈말 같다는 뜻이다.

말로 마음을 얻으려면, 말에 신뢰가 가야 한다. 신뢰가 가는 말에선 진정성이 느껴지는 법이고, 말하는 이 역시 그 분야의 전문가라는 인상을 줘야 한다. 그 분야의 전문가가 의지를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할 때, 믿음이 가는 법이다.

어차피 미래 먹거리로 평가되는 블록체인은 꾸준한 관심이 필요한 분야다. 총선 전 한 달여 사이에 정치인들이 갑자기 블록체인 전문가가 될 수도 없다. 그러나 4월 10일 뒤에도 이번 공약을 이행하려 노력하는 정당과 정치인은 4년 뒤 총선에선 진정성을 얻을 것이다. 신뢰는 급조돼 뱉는 말이 아니라, 일관성 있는 행동에서 나오는 법이다.

김백상 경제부 금융·블록체인팀장 k103@busan.com


김백상 기자 k10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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