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수의 지금 여기] 생명 다루는 의사들이 그럴 리 없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논설위원

집단행동 동참하는 의사 있지만
의료 현장 지키는 의사들 더 많아

생명을 최우선 가치로 받들라는
히포크라테스 선서 묵묵하게 실천

이들이 한국 의사의 대다수 아닐까
의료 사태, 대화로 실마리 찾아야

대동강물이 풀린다는 우수가 한참 지났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천지만물이 기운생동하는 절기. 동토를 견딘 풀과 나무들이 볕 좋은 뒷산 언덕에서 싹 틔우는 소리 들리는 듯하다. 봄이 한창 몸 풀 채비에 분주하니, 온 세상은 이내 울긋불긋 꽃 천지로 흐드러질 테다.

봄 기지개가 이리 반가운 이들이 한둘이겠냐만, 겨우내 병을 앓은 사람들만 할까. 만물이 깨어나는 이즈음은 육신의 고통으로 서러웠던 환자들이 회복과 치유의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시즌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의료 현장은 꽁꽁 얼어붙어 아직도 차갑고 혹독한 겨울이다. 의사들의 집단행동으로 의료 공백이 장기화할 우려가 커지면서 국민의 건강권이 위기에 처했다는 답답한 소식이 봄의 길목을 가로막는다.

안타까운 마음에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찾아본다. 의료인이 지켜야 할 이 윤리강령은 고대로부터 전승돼 오다 1948년 세계의사협회의 ‘제네바 선언’으로 확립된 이래 여러 차례 수정돼 지금에 이른다. 그중 가장 눈길 끄는 대목. ‘나는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이런 내용도 있다. ‘나는 인종·종교·국적·정당·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해 오직 환자에 대한 의무를 지키겠노라.’ 의사의 본분은 생명을 최우선시하는 고귀한 뜻에 있다는 것. 이는 의료가 돈이나 명예를 넘어선 초월적 숭고함의 영역임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의사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의료 현장을 떠나는 집단행동에는 그럴 만한 뜻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역사적 사례로부터 그것을 살필 수 있다. 의약분업 정책에 맞선 2000년, 원격 의료에 반대한 2014년, 코로나19 사태 때 의대 정원 확대를 막은 2020년. 그때마다 의료계는 단체적으로 저항했는데, 국민들은 그 연유를 따져 묻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의사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이 그것이다. 의사들은 그렇게 의료계 내부 모순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국민들에게 각성의 계기를 제공했다. 소중한 공로다.

현재 전국에 번진 의료 공백 사태는 전공의들이 앞장선 4년 전과 많이 닮았다. 당장 3월에는 전임의와 교수들마저 병원을 떠날 가능성이 점쳐진다. 환자들의 피해 확산과 의료 대란의 격화는 예정된 수순이다. 하지만 의사들은 이번 사태 속에서도 역설의 진리를 드러내는 데 기여한다. 2024년 의대 정원은 35년 전과 비슷한 규모인데 그 기간 한국의 인구는 21.9% 증가했다는 점, 노인 인구가 5배 늘어나는 동안 의사 인력은 동결됐다는 점, 인구 1000명당 의사 수가 한국은 2.6명으로 일본(2.6명)이나 미국(2.7명)과 비슷하다는 의사단체의 설명은 알고 보면 한의사까지 포함한 것으로, 한의사를 제외하면 의사 수는 2.18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제일 적다는 점 등등. 의사들이 집단행동으로 강경하게 이슈화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사실들이다.

시간이 지나야 보이는 것들이 있는데, 그걸 깨닫게 해 준 기여도 있다. 우리나라 응급·필수 의료체계를 떠받치는 전공의 체제가 그것이다. 전공의는 집단행동 때마다 반복되는 의료 공백의 장본인이다. 극심한 노동 강도에 시달리면서도 의대 정원 확대에 앞장서서 반대하는 모순적 행동을 보이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나중에 전문의가 돼 개원하면 고소득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기형적 의료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사태의 근본적 해결은 난망하다. 이렇게 한국 의료의 민낯이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은 전공의들이 근무지 이탈을 통해 직접 몸으로 증명한 덕분이다.

의사는 우리 사회의 엘리트다. 생각 없이 집단행동에 나설 리가 없다. 끝내 파국의 길을 걷고자 원할 리도 없다. 부조리한 현실을 보여줌으로써 스스로 반면교사의 사례가 되고, 국민들에게 그 심각성을 각인하려는 큰 뜻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 일부는 소중한 일터까지 과감히 포기했으니 그야말로 ‘살신성인’이다. 의료인들의 숭고한 의지, 헌신과 공로를 잊어선 안 되겠다.

한 가지 부연하고자 한다. 집단행동 같은 극단적 수단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려는 의사들이 있는 반면, 어떤 일이 있어도 의료 현장을 떠나지 않는 의사들도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생명과 목숨을 최우선 가치로 받들라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묵묵히 실천하는 의사들. 이들이 의사의 대다수를 차지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다면 이들이야말로 대한민국 의사들의 의중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제는 대화를 통해 공감대를 넓히는 방향으로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야 할 때다. 현장을 떠난 의사들은 더 늦기 전에 복귀하는 게 옳다. 집단행동으로 보여준 의사들의 참뜻은 이미 국민에게 다 전달됐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