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여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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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1955~ )

언덕 위에 줄지어 선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나무 뒤에서 말없이

나무들을 받아 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다

나뭇가지들이 살아온 길과 세세한 잔가지

하나하나의 흔들림까지 다 보여주는

넉넉한 허공 때문이다

빽빽한 숲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들끼리의 균형

가장 자연스럽게 뻗어 있는 생명의 손가락을

일일이 쓰다듬어주고 있는 빈 하늘 때문이다

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

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 모르는 사람은

-시집 〈슬픔의 뿌리〉(2002) 중에서

비어 있어야 채울 수 있다. 노자의 말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에도 이 말을 적용해 볼 수 있다.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나무 뒤에서 말없이/ 나무들을 받아 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란 표현은 비움이 갖는 의미를 형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허공 속의 나무가 아름다운 것은 채움을 감싼 텅 빔의 가치에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는 말은 사람살이의 핵심을 찌르는 경구다. 비어 있는 사람은 자신을 낮추고 관계를 두텁게 하여 생명을 살린다. 스스로 그늘이 되고 여백이 되는 사람들이야말로 은은한 여운의 아름다움을 풍긴다. 김경복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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