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시선으로] 눈치는 공평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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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현 역사문제연구소 인권위원

어려서부터 사람은 눈치를 학습한다. 무엇이 말로 드러나기 이전에 입을 닫고 주변의 공기와 사람들의 시선을 살피는 것은 사회생활의 중요한 학습이고 스킬이다. 그리고 그 학습과 스킬이 늘 정의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람이 눈치를 본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남의 가치 기준을 내면화하는 일이고,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던 바를 내 안으로 수용하는 일이다. 그렇게 눈치를 통해 한번 수용된 남의 가치관은, 말할 필요도 없는 침묵의 장 가운데 내 것이 된다. 마침내 나는 사람들 사이에 부드럽게 머무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한 사람이 눈치를 보던 입장에서 남에게 눈치를 주는 입장으로 돌변하는 것은 한 집단에 사람이 적응하는 과정의 전부다. 그 적응이란 말로 논쟁하는 범위를 넘어 온갖 비언어적 약속을 몸으로 익히는 것이 포함된다. 그렇기에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그 집단의 일을 말로써 문제제기하는 것은, 말 이전에 구성된 비언어적 평형을 깨뜨리는 일이 되고, 그만큼 부적응의 의미를 감수하는 일이 된다.

이처럼 사람 사이의 일이란 말로 드러난 것보다 말로 드러나지 않음의 비중이 더 크다. 사람이 어느 집단에서 눈치보는 데 성공했을 때 못내 안도감을 느끼는 것도, 그 말로 드러나지 않은 세계가 비로소 내 것이 된 듯한 기분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 사람이 한 집단에 새로 적응해 자신을 바꾸는 것만큼이나, 한 집단과 한 사회가 그러한 변화를 겪는 일 또한 의외로 잦다는 것이다.

한때 내가 안도하며 즐거이 적응해온 세상이 문득 변했을 때, 그 사람은 별안간 내 것이었던 침묵의 장을 뺏긴 듯한 기분을 느낀다. 무얼 뺏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므로, 그 사람은 이전에 자신이 적응한 세상이 옳다고, 지금 이 변화의 방향이 틀렸다고 강변하기 쉽다. 그 순간 그는 말할 필요도 없이 내가 세상의 일부인양 포근히 안기던 그 때의 느낌이 그립다. 내가 보아온 눈치가 처음부터 내게서 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젠더 감수성이 사회의 중요한 의제로 떠오른 후에, 거기에 미달되는 이들을 너무 쉽게 ‘캔슬’하는 것은 아니냐는 볼멘 소리가 잦다. 그것은 애초에 젠더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캔슬은 젠더가 부상하기 훨씬 전부터, 눈치가 존재하는 모든 곳에 수천 번 작동해온 익숙한 과정이다. 그것이 새삼 그토록 낯설다면, 한때 내 것처럼 친숙하였던 사회의 침묵이 내 편이 아닐 수 있음을 그제서야 직면한 때문이다. 그것이 내가 아닌 남의 것임을 한번쯤 경험해보는 일은 삶에서 중요하다. 내가 보아온 눈치와 거기에 깔린 침묵이 결코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았음을 깨닫는 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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